[광화문에서/권순택]親美와 自主의 부적절한 만남

  • 입력 2006년 9월 27일 20시 59분


“(한국이 미국에) 베트남전쟁과 이라크 파병, 미2사단 후방 배치 등 결국 줄 것은 다 주면서 좋은 소리를 못 듣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14일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는 작심한 듯 “미국이 독일 프랑스를 대하듯이 한국을 존중하고, 한반도 문제에 있어 발언권을 존중하는 태도를 취해 주는 게 옳다”고 덧붙였다. 심지어 6·25전쟁과 분단에 대한 미국 책임론까지 거론했다.

김 전 대통령은 한미동맹 관계가 흔들리고 북-미관계가 안 풀리는 것을 ‘미국 탓’으로 돌린 셈이다. 그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한쪽만 문제 삼은 것이다. 한미동맹과 북-미관계에 문제가 생긴 데에는 자주를 앞세운 노무현 정부의 책임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한국 대통령이 미국 하자는 대로 ‘예, 예’ 하길 한국 국민이 바라느냐”고 일갈한 적이 있다. 그러나 노 대통령만큼 미국의 이익을 위해 ‘예, 예’ 한 한국 대통령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과거 정부가 약속한 뒤 미뤄 온 주한미군 기지 이전, 주한 미 대사관저 이전 같은 한미 간 숙제들을 해결해 줬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라크 파병,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인정,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처럼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골치 아파하거나 내심 바라면서도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한 과제들까지 해결하도록 계기를 만들어 도와주고 있다. 그런데도 왜 미국은 한국에 불만일까.

“반미면 어때”로 집권한 노 대통령은 최근 들어 ‘친미자주(親美自主)’를 대미관계의 기본 노선이라고 했다. 자주라는 명분을 위해 협상 과정에서 버티기도 하고 이라크 파병처럼 타이밍을 놓치기도 했다. 전략적 유연성 문제는 결국 다 들어주면서 12차례나 회의를 하는 바람에 안 해 준 것만도 못한 결과를 초래했다는 평가도 받았다.

협상 과정도 문제였다. 비생산적이고 소모적이었으며 아마추어 정권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그러니 좋은 말을 듣기 어려운 것이다. 이라크 파병과 북한 핵문제처럼 상호 관련 없는 문제를 연계했다가 콜린 파월 당시 국무장관에게서 “동맹이라면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다”는 핀잔까지 들었다.

더 심각한 것은 미국이 노 대통령의 의도를 순수하게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친미자주’를 ‘자주를 위한 위장된 친미’ 정도로 보고 있다. 워싱턴의 한 소장 한반도 전문가는 “세미나에 가 보면 보수파나 진보파나 모두 노 대통령의 말은 못 믿겠다고 한다”고 워싱턴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친미자주’에 대해 “요즘 미국에서는 노 대통령의 입에서 나온 말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어떤 표현이건, 지금 시점에서 새로운 표현이 무엇이든지 주목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박정희 정권은 1960년대 베트남 파병을 미국의 주한미군 감축 정책 저지용으로 활용했다. 박 정권은 파병 협상에서 차관(借款) 제공과 대미 수출 확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설치 지원 등의 요구 사항을 관철했다. 이는 베트남 특수(特需)와 함께 한국 경제 발전이라는 국익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박 대통령은 심지어 협상을 유리하게 끌어가기 위해 자신의 심복인 공화당 차지철 의원에게 파병 반대운동을 벌이라고 비밀리에 지시하기도 했다. 부적절하고 생경한 자주와 친미의 결합보다 국익을 최우선시하는 정책이 왜 중요한지를 선배 대통령이 진작 보여 줬다.

권순택 논설위원 maypol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