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정옥자]오솔길의 예의

  • 입력 2006년 9월 29일 03시 01분


지금 사는 동네에서 가장 좋은 점은 뒷동산이 있다는 것이다. 용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용두산이라는 이름이 있지만, 지금은 동네 주민을 위한 공원으로 개발돼 서리풀공원이라고 불린다. 서초역 쪽으로 정보사를 끼고 있어 일부는 출입이 불가능하지만 그런대로 동네의 허파 노릇을 톡톡히 한다.

집에서 출발하여 산 정상까지 빠른 걸음으로 올라가 거기 있는 운동기구를 차례로 섭렵하노라면 등에 땀이 흐른다. 맨손체조까지 하고 쉬지 않고 달려 내려와 집에 도착하면 통틀어 1시간 20분 정도 걸린다. 격렬한 운동은 피해야 하고 주기적으로 적당한 운동을 해야 하는 나이에 이보다 더 좋은 운동은 없다는 생각이다.

작은 동산에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지고 예쁜 들꽃까지 반겨 주니 고맙기 그지없다. 몇 년 전까지 봄에는 산딸기 따먹고, 가을에는 산밤 줍는 재미까지 선사하더니 사람의 발길이 잦아진 지금은 산딸기가 자취를 감추었다.

처음 그곳에 올라 운동을 하던 날이다. 중년 남자 여러 명이 질펀하게 앉아서 수다를 떠는데 참 남자들의 수다도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며 열심히 운동기구를 돌리고 있었다. 느닷없이 한 남자가 내게 오더니 여기는 남자의 구역이니 저 아래로 가라고 명령조로 말하는 것이 아닌가?

처음엔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눈만 멀뚱거리던 나는 조금 후에 사정을 알아차렸다. 운동기구가 두 군데 몰려 있는데 산 위쪽은 남자, 아래쪽은 여자의 구역으로 구분 짓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위쪽이 시원하여 맘에 드는데 싶어 “공원에서도 남녀 유별합니까?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남녀칠세부동석’ 같은 말씀을 하세요? 여기가 동네 사랑방도 아니고…” 하고 쏘아붙였다.

얼핏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그대로 밀고 나갔다. 머쓱해진 남자와 그 패거리는 다시는 시비를 걸지 않는다. 지금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조차 없다. 나는 그때 생각을 할 때마다 희미하게 웃음이 나온다. 이른바 전통을 공부하는 국사학자라는 사람도 이럴진대 다른 사람은 오죽 전통을 우습게 알랴 싶기도 하다.

그런데 그 산에 오를 때마다 불편한 일이 있다. 좁은 오솔길을 서로 지나칠 때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느냐는 문제다. 나는 당연히 왼편으로 가려는데 상대방은 내가 피해 가려는 쪽으로 다가서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서로 부딪치거나 갈팡질팡하며 기분을 상하는 일이 종종 생긴다. 어쩌다 비켜서는 사람을 만나면 경이롭기까지 하다.

우리 어려서만 해도 저만큼 어른이 오시면 다소곳이 비켜섰다가 가라고 배웠다. 십자로에서 어른이 가시는데 길을 싹 가르고 가면 버릇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십자로에서 마주칠 만하면 일부러 빨리 뛰어 길을 싹 가르고 지나가는 젊은이를 대하면 기분이 언짢아지곤 한다. 그리하여 속으로 “나도 별수 없이 늙어 가는구나” 하며 쓴웃음을 짓는다.

그리고 ‘동방예의지국’이라던 전통시대 우리나라의 별명을 떠올린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 난을 겪은 후 조선은 무너진 국가질서를 회복하고 사회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예로써 나라를 다스린다는 예치(禮治)를 국가의 기본 방향으로 설정했다. 그리하여 그 이론서인 예서(禮書)들이 쏟아져 나왔다. 예가 정치 문제가 되어 예송(禮訟)도 일어났다. 그 결과 예의의 나라를 구현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후손들은 작은 오솔길에서 어떻게 서로에게 폐가 안 되게 지나가야 할지도 몰라 서로 당황한다.

나쁜 전통은 속박이 되지만 좋은 전통은 우리의 역할모델이 될 수 있다. 그렇게 예의를 차리던 전통을 우리 스스로 계승하지 못하니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예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애경(愛敬)을 극진하게 하는 준칙’이라는 정신을 살려 하루빨리 현대예서를 만들어 우리 모두 예의를 지키는 세상을 만들어 갔으면 싶다. 오솔길에서 서로 편안히 지나갈 예의가 그립다.

정옥자 서울대 교수·국사학과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