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경제교과서는 이와 다르게 가르친다. 명목이자율은 ‘실질이자율+물가상승률’로 정해지기 때문에 돈을 찍을수록 물가가 올라 금리도 비싸진다는 것이다. 통화량 증가는 분명히 금리에 영향을 주지만 경제 기사에 나오는 것처럼 금리를 떨어뜨리는 방향이 아니라 반대로 금리를 끌어올린다는 얘기다.
사실 돈을 풀 때 금리가 떨어지는 것은 아주 단기적인 현상일 뿐이다. 나아가 돈을 푼다고 투자가 늘어날지는 매우 의문스럽다. 이런 점을 모르지 않았을 재계 인사들이 당시 그런 주장을 편 것에 대해 “기업의 과중한 부채 부담을 인플레로 덜어 보려는 의도였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물가가 올라 돈 가치가 떨어지면 채무자는 상환 부담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것은 에드먼드 펠프스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가 ‘실업과 물가의 관계에 관한 이론’으로 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물가가 오르면 실업률이 떨어지고, 물가가 내리면 실업률은 올라간다’는 이른바 필립스곡선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많은 사람이 인플레를 예견하는 상황에서는 돈을 풀어 봐야 실업을 완화하지도, 성장을 자극하지도 못한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1979년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으로 취임한 폴 볼커가 펠프스의 이론을 받아들였다. 인플레 요법이 성장을 촉진할 수 없다면 물가라도 잡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 볼커는 강력한 물가안정정책을 펴 1970년대의 만성적 스태그플레이션을 해소했다. 또 당시까지 경제운용에 있어서 무소불위의 권한을 지닌 것처럼 묘사되던 중앙은행의 역할은 그 후 ‘잠재성장률(자연실업률)에 수렴하도록 경제를 안정시키는’ 수준으로 한정됐다.
그렇다고 해서 펠프스의 이론에 기대어 “잠재성장률을 달성했으니 족하다”는 식이어서는 곤란하다. 노무현 정부는 연 4년째 잠재성장률에 못 미치는 경제성장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지만 말이다. 사실은 펠프스 이후 성장의 논리가 바뀌었다. ‘통화나 재정 등 거시정책이 아니라 미시적 측면에서 경제의 생산성을 높여 잠재성장률 자체를 끌어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기업의 연구개발과 기술향상이 중요하다. 제도적으로는 재산권 등 법치주의의 확립, 개방과 경쟁 환경 조성, 부패근절, 규제개혁 등이 필요하다. 교육경쟁력 강화도 빼놓을 수 없다.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로 정치·경제적 안정이 꼽힌다. 최근 북한의 핵실험 발표는 엄청난 불안요소로 현 정부는 이 부문에서도 큰 실패를 기록한 셈이다. 벌써 민간 경제연구소에서는 자본시장 불안과 투자·소비 위축으로 내년 성장률이 2∼3%대에 머물 것이라는 어두운 관측이 나오고 있다. 북핵에 따른 경제 위기관리의 핵심은 ‘외자(外資)를 어떻게 안심시켜 붙잡아 둘 것인가’가 될 것이다. 이 시점에서 과거의 실책을 자꾸 들먹여 뭐하랴. 앞으로 위기대응이라도 잘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허승호 논설위원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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