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쟁 당시 주월(駐越)한국군사령관을 지낸 채명신(80) 예비역 육군중장은 16일 본보 논설위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지금의 한국 상황이 월남 패망 직전과 비슷하다”고 우려했다. 그는 “그로부터 31년이 지났지만 북한 공산집단의 적화(赤化) 야욕은 공산 월맹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며 월남 패망을 지금도 뼈아픈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민족 공조’ ‘민족끼리’라는 북한 정권의 주장과 친북세력의 부화뇌동은 ‘함정’이므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가 처한 상황이 크게 걱정돼 최근 ‘베트남전쟁과 나’라는 회고록을 서둘러 펴냈다고 했다. 이 책은 요즘의 한국이 닮아 있는 ‘월남 패망 직전의 양상’ 네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공산 월맹의 실체와 음모를 제대로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월맹의 선전과 심리전에 쉽게 말려들었다. 둘째, 베트콩의 모략과 이간책으로 월남 국민의 반미(反美)감정이 격화되고 미군 철수를 부르짖었다. 셋째, 월맹의 첩자들이 월남 대통령의 측근은 물론이고 국가기관과 종교계 학계 언론계 문화예술계 등에 광범위하게 침투해 거미줄 같은 망을 구축하고 활동했다. 넷째, 권력층의 부패가 만연해 베트콩의 활동과 세력 확장에 좋은 조건을 제공했다.
채 장군은 당시 70억 달러(7조 원 상당)에 이르는 군 장비를 월남에 놓고 철수한 미국 역시 큰 교훈을 얻었다고 소개했다. 즉 “스스로를 지키려 하지 않는 부패하고 해이해진 나라는 도와줄 필요가 없고 도와줘도 소용없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국가전략이 잘못되면 어떤 군사전략도 소용없다”고 잘라 말했다. 북한이 핵실험을 감행한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국제사회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고, 군사동맹은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지에 대해 소중한 시사점을 보여 준다.
그는 “전쟁의 궁극적인 목표는 승리에 있고, 승리가 최고의 가치”라고 말한다. 미국과의 군사동맹이나 전시작전통제권, 미군 주둔 및 증원군과 핵우산 보장 문제 등에 대한 판단도 ‘유사시의 승리’에 도움이 되느냐 아니냐를 잣대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전시작전권 환수(단독 행사) 문제만 하더라도 대북(對北) 정보에 까막눈인 우리가 어떻게, 그것도 미군에 대해서까지 작전 지휘를 하겠다는 것이냐고 채 장군은 되물었다.
핵무기도 그렇다. 북의 핵실험은 재래식 전력(戰力) 위주의 대칭적 남북관계를 ‘핵보유국 북한 대(對) 비핵국 남한’이라는 비대칭적 관계로 변화시켰다. 이를 억지(抑止)관계로 되돌리려면 미국과의 확실한 핵 동맹이 유일한 해법이다. 노무현 정부 내 일부 정책 담당자들의 발상대로 미국의 핵우산을 걷어치우면 우리의 운명은 뻔하다.
박용옥 한림대 국제대학원 부총장은 “북은 핵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며 “한미동맹의 기본인 핵우산을 제거하려는 정부 일각의 기도는 이들의 대북관(對北觀) 안보관을 잘 드러내 줬다”고 말했다. 1953년 정전협정 체결을 촉진시킨 것은 미국 아이젠하워 정권의 ‘중국 본토에 대한 핵 공격 위협’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육정수 논설위원 soo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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