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상열]‘순환출자 금지’ 투기펀드만 웃는다

  • 입력 2006년 10월 30일 03시 00분


한반도에 주한미군이라는 안전판이 없었다면 우리 경제의 모습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아마도 국방문제를 해결하느라 경제 개발에 다걸기(올인)하지 못했을 것이며 오늘날 세계 12위권 경제대국의 위치까지 올라서기 어려웠을 것이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계열사가 투자해 주고 우호주주로서 버팀목 역할을 해 주지 않았다면 자동차나 반도체 등의 신사업 분야에 진출해 세계 일류 기업으로 성장하는 것 역시 힘들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런데 얼마 전 공정거래위원회가 순환출자 금지 방침을 밝혔다. 계열사 도움 없이 홀로서기를 하라는 주문인 셈이다. 내심 출자총액제 폐지를 기대하던 기업으로서는 경영권 방어가 발등의 불이 되고 투자는 아예 뒷전이 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정책 외에는 정말 마땅한 대안이 없는지 안타깝기 그지없다.

당국은 보유 주식보다 많은 의결권을 행사해 기업지배구조가 왜곡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한다. 하지만 외국에서는 순환출자 대신 상호출자를 해도 문제되지 않고, 경영진에 일반주주보다 수십 배의 의결권을 부여하는 경우도 많다는 점을 감안할 때 쉽게 수긍하기 힘들다.

물론 경영권이 확고부동하면 경영권 남용을 마땅히 통제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기업은 이미 외국인들이 갖고 있는 주식이 국내 대주주보다 많고, 이사회에서는 사외이사 비중이 경영진보다 더 커졌다. 최고경영자(CEO)가 주주 이익에 상충되는 결정을 마음대로 내릴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시민단체에서 조그만 의혹에도 감시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고 내부고발제도가 도입돼 있기 때문에 경영권 남용을 걱정해 규제를 강화할 필요는 별로 크지 않은 것 같다. 설혹 시장감시기능의 작동이 불충분하다고 해도 순환출자 금지제도를 도입할 명분으로는 부족해 보인다. 이런 문제는 재정경제부나 금융감독위원회 등 감독관청의 감시활동을 강화함으로써 해결할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순환출자 금지가 국가경제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 좀 더 냉정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당국도 계열사 지분을 모두 정리해 우리 기업이 투기펀드의 인수합병(M&A) 공격에 속수무책이 되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주회사로 전환해 지배구조를 투명하게 만들라는 주문일 것인데 순환출자 금지의 사정권에 든 기업의 경우 수십조 원의 자금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현실적이지 못하다. 다음으로 다른 계열사가 지분을 대신 취득해 순환출자 고리를 끊는 방법이 있지만 이 경우에도 수조 원대의 소요자금을 댈 수 있는 곳이 없어 불가능에 가깝다고 한다.

현실적인 정책대안은 순환출자를 10∼20년에 걸쳐 할부금 갚아 나가듯이 해소하는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얻어지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순환출자를 해소한다는 점밖에 달라질 것이 없는데 그것이 급변하는 글로벌 경쟁 환경에서 투자를 미루고 매달려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인지 회의적이다. 특히 순환출자가 발생한 배경이 부실기업을 떠맡거나 당국의 계열분리 명령에 순응하는 등 가공자본 형성과는 무관하다는 점에서, 단죄하듯이 ‘소급해 해소하라’는 것은 대단히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다.

최근 경제가 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기업지배구조 개선이 미진하다는 인식에 얽매여 경제 검찰 기능만 강화하다 보면 속력이 더욱 떨어질 수 있다. ‘사슴을 쫓는 자는 토끼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옛말처럼 정부에서도 경제 전체의 관점에서 장래를 내다보는 정책을 펴 주었으면 한다. 기업들도 윤리 경영에 더욱 힘쓰고 있는 만큼 이제 정부에서도 규제를 과감히 털고 투자하기 편한 환경을 만들어 주기를 기대해 본다.

김상열 대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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