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장영희]천천히 춤추세요

  • 입력 2006년 11월 3일 03시 00분


얼마 전 미국의 인터넷에서 작은 ‘사건’이 있었다. 미국에서 시작돼 전 세계로 무서운 속도로 확산되던 e메일 사슬편지가 사기로 밝혀진 것이다. 국내에도 꽤 알려진 이 편지는 ‘천천히 춤추세요’라는 시로 시작된다.

“아이들이 회전목마 타는 걸 본 적 있나요?/땅 위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적 있나요?/어지럽게 날아가는 나비를 따라가 본 적 있나요?/어스름 저녁 하늘로 사라지는 해를 본 적이 있나요?/천천히, 천천히 하면 어떨까요./그렇게 빠르게 춤추지 마세요./시간이 얼마 없고 음악은 오래 계속되지 않아요./‘오늘 말고 내일 하자’라고 아이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죠?/전화 한 통으로 안부 물을 시간도 없어/친구와 연락은 끊기고 우정은 사라졌죠?/매일을 걱정하고 서두르면서 살아가는 건/선물을 열어 보지도 않고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죠./삶은 경주가 아니잖아요. 천천히, 천천히 춤추세요./음악을 들으세요. 노래가 끝나기 전에.”

필라델피아에 있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병원의 의사 데니스 실즈 교수 명의로 된 편지는 “이 시는 소뇌암으로 6개월 시한부 인생인 나의 환자이자 아홉 살 난 소녀 제시카 마이덱스가 쓴 시입니다. 이 시를 보낼 때마다 미국 암협회가 한 명당 3센트씩을 기부하니 꼭 이 편지를 다른 이들에게 전달해 주십시오”라는 말로 끝난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마이덱스를 돕기 위해 열 명, 아니 스무 명에게 편지를 전달했다.

사기로 드러난 e메일 사슬편지

그러나 시를 썼다는 시한부 인생의 마이덱스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판명됐다. 아인슈타인 병원은 실즈 교수가 편지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공식적으로 밝혔고 미국 암협회도 3센트설(說)은 사실무근이라고 발표했다. 죽어가는 아홉 살 소녀가 썼다는 이 글은 건강한 40대 남자이자 아동심리학자 데이비드 웨더퍼드 씨가 1991년에 발표한 시로 밝혀졌다.

시한부 인생의 어린이가 쓴 감동적인 시와 환자를 사랑하는 유명한 의사. 사람의 주목을 끌기에 완벽한 조건을 허위로 갖추고 누군가가 장난을 친 것이다. 아니면 누군가가 선의로 좋은 메시지를 좀 더 효율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전하기 위한 시도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국 누리꾼들은 이에 대해 극도의 불쾌감을 나타냈고, 의사들도 분노했다. 명의 도용은 심각한 범죄일 뿐만 아니라 이 경우 ‘전문성 침범’이라고 했다. 즉, 의사라는 전문직을 감히 침범해서 결과적으로 의사의 신망을 떨어뜨렸다는 것이다.

국내 출판계에도 얼마 전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미모의 아나운서가 번역해 10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의 번역가가 따로 있었다는 것이다. 출판사와 당사자가 이런저런 구차한 변명을 하고 책을 산 독자들이 소송까지 하겠다고 나서는 시끄러운 사태로 발전했다.

따지고 보면 사실 이것도 ‘전문성의 침범’이다. 출판사는 번역을 전문직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번역과 전혀 무관한 인기인의 이름을 올렸고, 아나운서는 번역은 아무나 하는 것이니 번역의 번 자도 모르는 자신도 번역가가 될 수 있다고 이름을 내줬다. 독자는 번역은 누가 해도 괜찮은 것이니 이왕이면 인기인의 이름이 표지에 적힌 책을 사 줬다. 의사처럼 사회에서 대접받지 못하고 변호사처럼 돈을 벌지 못해도, 번역가도 분명 강도 높은 훈련과 노력을 통해야 될 수 있는 엄연한 전문직이라는 사실을 무시한 것이다.

행복한 삶 위한 ‘타산지석’ 삼길

하지만 직업의 전문성 무시보다 더 중요한 건 인간 ‘기본’의 무시이다. 내가 쓴 글엔 내 이름을, 남이 쓴 글엔 남의 이름을 붙이는, 유치원 아이도 알 만한 기본상식이 무시됐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점은 거짓으로 유포된 ‘천천히 춤추세요’는 우리가 서로를 진정으로 대하며 행복하게 사는 법을, 대리 번역으로 거액을 챙긴 문제의 책은 남의 것 탐내지 말고 성실하게 노력해서 정정당당하게 성공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춤에 휘말리고, 걸핏하면 내 과자 숨겨 놓고 남의 과자 빼앗아 먹으며 ‘기본’을 잊고 사는 우리에게 울리는 경종치고는 참 아이로니컬하다.

장영희 서강대 교수·영문과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