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진녕]上王정치와 연꽃정당

  • 입력 2006년 11월 9일 03시 00분


지난주 노무현 대통령이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동교동 사저를 찾았을 때 한나라당 김정훈 정보위원장은 “DJ가 상왕(上王)정치를 하려 한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을 왕, DJ를 상왕에 빗대 DJ가 권좌에서 물러난 뒤에도 정치에 관여하고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지난달 9일의 북한 핵실험 이후 DJ의 행보를 보면 그런 말을 들을 만하다. 그는 전남대와 서울대에서 강연했고, 한양대 최고위과정과 세계지식포럼 개막식에서 연설했다. AP통신 로이터통신 CNN CBS 뉴스위크 등 외국 언론들과 인터뷰를 했고, 영문저널인 글로벌아시아 창간호에 기고를 했다. 전남 목포시를 방문해 역광장과 신안비치호텔에서 연설했고, 저명인사 1000여 명을 초청한 가운데 김대중도서관 후원의 밤 행사를 가졌다.

8일엔 부산 ‘2006 국제교통물류박람회’에 참석해 ‘철의 실크로드’에 대한 기조연설을 했다. 추병직 건설교통부 장관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하는데, 왜 DJ가 초청됐는지 의아하다.

이런 자리에서 그가 단골로 강조하는 게 있다. 바로 ‘북의 핵은 햇볕정책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가 햇볕정책 지키기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이유는 그것이 지금 자신을 지탱해 주는 외다리 기둥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민주화투쟁은 대통령 당선으로 보상받았다. 남북문제 말고는 집권 후 업적으로 내세울 만한 것도 별로 없다.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 노벨 평화상 수상도 따지고 보면 모두 대북정책, 곧 햇볕정책의 결과물들이다. 햇볕정책을 잃으면 모든 걸 잃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이런 자리를 갖는 데 그치지 않고 노골적인 정치적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지금 당장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햇볕’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신에게 우호적인 좌파정권의 탄생을 도우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는 “여당의 불행은 (민주당과의) 분당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직격탄을 날리더니 지난달 28일 목포를 방문해서는 ‘무호남 무국가(無湖南 無國家·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라는 글귀를 남겼다. 열린우리당과 노 대통령이 지금 국민의 외면을 받고 있는 것은 호남을 무시했기 때문이고, 향후 정계개편과 대선에서 정치적 생명을 부지하려면 호남과 자신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암시가 아니겠는가.

그에 대해 노 대통령은 DJ 사저 방문, 포용정책을 계속 지켜나가겠다는 국회 시정연설로 화답했다.

한 정치컨설팅 회사는 최근 열린우리당을 ‘연꽃정당’이라고 표현했다. 지지기반의 해체와 민심과의 괴리 등으로 국민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모양새가 마치 물 위에 떠있는 연꽃 같다는 얘기다.

노 대통령은 언제 가라앉을지 모를 그런 연꽃을 불안하게 타고 있는 처지지만 어떤 형태로든 살리고 싶어 한다. 버릴 수 없는 정치적 기반이기 때문이다. 햇볕정책 사수(死守)에 안간힘을 쓰는 DJ가 손짓을 하자 맞잡은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열린우리당 김혁규 의원은 8일 “정계개편의 동력은 DJ와 노 대통령에게서 나올 것”이라고 호언했다.

노 대통령이 ‘지역구도 타파’를 명분으로 태어난 정당을 지키려고 다시 지역할거주의에 기대는 모습이나, DJ와 노 대통령을 위태롭게 한 북의 핵실험이 오히려 두 사람을 연결하는 끈이 되고 있는 것은 기막힌 아이러니다.

이진녕 논설위원 jinny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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