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하버드대의 2005∼2006학년도 대입 에세이 주제 중 하나다.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한 문제다.
한 재미교포는 이 주제로 에세이를 써 하버드대에 합격한 아들의 합격 통지서를 받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고 한다. 아들은 한국을 찾아 할아버지와 친척을 만나면서 느낀 뿌리에 대한 소중함을 진솔하게 적었다. 에세이 초고를 보며 ‘저렇게 써서 되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아들과 말다툼을 했는데 계속 간섭했더라면 어른의 시각이 담겨 쓰레기통에 들어갈 글이 될 뻔했다는 것이다.
입학해서 입시 담당자들로부터 “에세이가 감동적이었다”는 칭찬을 들은 아들은 논술을 위한 사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 느낀 대로 써 내려갔을 뿐이다.
‘정의냐, 부정의냐는 관습적으로 구별될 뿐인가.’
‘언어는 상호 소통을 위한 수단일 뿐인가.’
‘18세기 독일 문학이론에서 셰익스피어 작품에 관한 논의가 차지하는 의의를 설명하고, 임의의 독일 희곡 작품을 들어 거기에 나타난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논하라.’
프랑스나 독일의 고교생이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치르는 논술 문제다. 프랑스의 바칼로레아는 1808년 시작돼 거의 2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칸트, 헤겔 등 유명 철학자를 배출한 독일의 아비투어는 1788년 도입됐다. 이들 나라에선 초중고교에서 수준 높은 토론식 수업을 하기 때문인지 이런 논술 문제가 어렵다고 시비를 걸지는 않는다.
우리는 어떠한가. 원고지 쓰는 법, 글 쓰는 법을 학교에서 배웠다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수험생들은 학교를 믿지 못하고 논술학원에 갈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최근 서울대 이장무 총장이 “학원 논술로는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한다. 강남 학원의 시험 문제는 제외하겠다”고 말했다. 주요 대학들도 “학원에서 배운 정형화된 글은 창의성이 없이 외워 쓰거나 짜깁기한 ‘붕어빵 논술’”이라며 창의성을 강조하고 있다.
교육부는 이건 되고 저건 안 된다는 식의 논술 가이드라인을 강요하고, 대학들은 우수 학생 고르기에 치중하다 보니 논술 문제에 대한 논란이 더욱 커지고 있는 듯하다.
고교에선 “통합논술이 어려워 도저히 가르칠 수 없다”며 쉽게 출제해 달라고 하소연한다. 성의 있는 학교는 여러 교과 교사들이 팀을 짜 가르치면서 나름대로 좋은 성과를 얻지만 아무래도 역부족이다. 대부분의 학교는 자포자기 상태다.
일부 논술학원은 “조건이 많은 문제의 답안은 정형화될 수밖에 없다. 튀는 논술이 꼭 좋은 글은 아니다”며 “학생 탓만 하지 말고 교수들은 얼마나 잘 쓰는지 직접 써 보라”고 원색적 비난을 하기도 한다.
대학과 고교, 학원가가 서로 ‘논술 핑퐁’을 하는 중에 불안해하는 쪽은 수험생과 학부모다. 대학이 글쓰기를 배운 적이 없는 학생들에게 창의적인 글을 쓰라고 호통만 치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우수생을 뽑고 싶은 대학의 의도도 있겠지만 고교와 학생들이 ‘연착륙’할 수 있는 지혜와 시간이 필요하다. 이상도 좋지만 땅에 발을 딛고 현실 개선 노력에 앞장서는 것도 상아탑의 중요한 사회적 책무가 아닐까.
이인철 교육생활부 차장 inchu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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