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정부 때 국제그룹이 전 대통령의 아호가 붙은 일해(日海)재단 모금에 적극 호응하지 않고 양정모 회장이 청와대의 재계 회동에 지각한 뒤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받고 그룹의 공중분해를 맞았다는 이야기는 한국 기업사의 전설로 남아 있다. 진정한 민주시대라면 청와대의 재벌 회장 점호는 사라져야 할 관행이다.
대통령의 외국 순방 때도 재벌 회장들이 승합차에 끼어 타고 대통령 탑승차의 뒤를 따라다니는 모습이 여러 차례 희화화(戱畵化)된 적이 있다. 대통령의 심기(心氣)가 투영되는 세무조사를 비롯해 기업인들이 대통령 앞에서 떨 수밖에 없는 한국적인 현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대통령과 기업인들이 함께 회의를 해야 할 일이 있더라도 모든 재벌 회장이 다른 일정을 다 취소하기보다는 사정에 따라 다른 경영진이 대신 갈 수도 있어야 한다.
세무조사가 ‘기업 길들이기’용으로 악용돼서도 안 된다. 국세청은 아파트 고(高)분양가 논란을 빚은 4개 건설업체에 대해 예고 없이 전격적으로 세무조사에 들어갔다. 국세청은 분양가 통제를 뒷받침하기 위한 일제 세무조사는 아니라고 해명하지만 이 말을 곧이듣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아파트 분양을 앞둔 다른 건설회사들도 국세청 눈치를 보며 분양가 인하 방안을 놓고 고민 중이라고 한다.
전군표 국세청장은 7월 인사청문회에서 “2001년 언론사 세무조사가 정치적 의도로 실시됐다는 오해를 받을 소지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전임자인 이주성 청장이 6월에 갑자기 사퇴한 것도 언론사 세무조사를 하라는 정부 실세(實勢)들과의 갈등 때문이라는 설(說)이 있었다. 세무조사가 특정 정책을 강행하기 위한 수단이나 ‘겁주기’용으로 쓰여서는 민주주의가 실질적으로 확립된 국가라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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