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내일/오명철]원고 수발의 추억

  • 입력 2006년 11월 29일 20시 11분


과거에는 우편이나 팩스로 필자들의 원고를 받던 신문사에서 요즘은 주로 e메일을 통해 원고를 받는다. 그런 까닭에 필자들의 정성과 영혼이 담겨 있는 육필(肉筆) 원고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소설가 최인호 씨는 워낙 악필(惡筆)이어서 신문사에 해독(解讀) 전담자가 있었다. 황석영 씨는 신문에 ‘장길산’을 연재하면서 때로 문학 담당 기자에게 전화로 원고를 불러주곤 했다. 문화부 기자라면 누구나 원고가 펑크 나거나 필자가 잠적해 버려 곤혹스러워했던 일화를 한두 개쯤은 갖고 있다.

글은 곧 사람

‘무소유’의 법정 스님은 아직까지 육필 원고를 고집한다. 강원도 화전민촌 오두막에 기거하시는 스님은 동아일보에 ‘산에는 꽃이 피네’를 연재하실 당시 손수 3시간여 차를 몰고 와서 원고를 주시곤 했다. 당시 원고 수발을 담당하던 기자는 스님께 큰절을 올리고 차 한 잔을 나누며 원고를 받아 세심히 검토한 뒤 신문사로 돌아와 재교, 삼교를 거듭한 뒤 원고를 넘기곤 했다. 먼 길 달려오신 스님의 노고와 정성을 생각해 오·탈자를 내지 않기 위해서였다. 당시 스님이 쓰신 원고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가보처럼 보관하고 있는 것은 망외(望外)의 기쁨이다.

역사학계 원로인 고 이기백 선생의 선비적 면모 또한 잊을 수 없다. 1980년대 중반 어느 해 여름 청탁 드린 원고를 받기 위해 선생의 댁을 찾았다.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모시 적삼을 곱게 차려 입은 모습으로 맞아 주셨다. 자택 가득 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卷氣)가 배어 있었다. 선생은 차 한 잔을 권하시며 세상을 걱정하셨다. 제자의 제자뻘인 젊은 기자에게 시종 말을 높이셔서 몸 둘 바를 몰라 했던 기억이 난다. 원고지의 필적(筆跡) 또한 선생처럼 단아했다. 아파트 경비실에 원고를 맡겨 놓거나 부인을 시켜 문 사이로 원고를 건네주는 이도 있던 때여서 그런지 선생의 모습이 더욱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아름답고 소중한 원고 수발의 추억만이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어느 변호사 단체장의 경우 원고를 받기로 한 당일 아침 사무실로 가 보니 정작 본인은 없고 후배 변호사가 원고를 작성하고 있었다. 전화로 당사자를 찾아 “이러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항의했더니 “평소 내 생각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내 글이나 다름없다”고 강변해 어이가 없었다. “변론도 남이 대신하도록 하느냐”고 따졌더니 더는 말을 하지 못했다. 글로 먹고사는 작가와 교수 중에도 ‘기본이 안 된’ 이들이 적지 않다. 같은 날 다른 신문에 똑같은 원고를 보낸 이가 있고, 같은 주제를 적절히 손질해 중복 투고한 사례도 적지 않다.

하루 전에 부탁해도 옥고(玉稿)를 보내 주는 필자가 있고, 충분한 시간을 두고 원고를 청탁했지만 막상 받은 원고를 보면 게재를 고민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글 잘 쓰는 분들일수록 매너도 좋고 신문의 편집권과 원고료 지급 기준도 존중해 준다는 사실이다. 옛 어른들의 말처럼 ‘글은 곧 사람’인 것이다.

‘원고 순수성’ 걱정되는 대선의 계절

언젠가 뉴욕타임스의 ‘의견과 칼럼난’(Op. Editorial Page) 에디터를 만났더니 자기들도 외부 필자들의 원고에 퇴박을 놓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노벨상 수상자도 예외가 아니라고 한다. 외부 칼럼의 원고료가 편당 300달러 정도로 국내 권위지에는 못 미치지만 모든 이들이 뉴욕타임스에 글을 싣는다는 사실 자체를 큰 영예로 여긴다고 한다.

정작 원고 수발보다 더 큰 한국 언론의 고민은 다가오는 차기 대통령 선거 같은 ‘계절적 요인’이다. 유력 대선주자의 눈에 들기 위해 언론을 교묘하게 이용하려 드는 무리들이 줄을 잇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들일수록 ‘연줄’을 동원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요즘 국내 신문의 편집책임자들은 필자의 정치 지향 여부를 따지고 원고의 순수성을 가려내느라 무척 애를 먹는다.

오명철 편집국 부국장 oscar@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