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군주시대 ‘양위 파동’, 민주시대 ‘임기 파동’

  • 입력 2006년 12월 4일 03시 00분


조선시대 임금들도 ‘퇴임 선언’을 정치적 카드로 종종 활용했다. 태종부터 영조에 이르기까지 많은 임금이 ‘이제 물러나야겠다’는 양위(讓位) 선언을 하는 것으로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도 하고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도 했다.

태종의 양위 파동은 세 번이나 있었다. 재위 6년째인 1406년부터 1418년 셋째 아들 충녕대군(세종)에서 보위를 넘겨주는 날까지, 태종은 양위 발언을 되풀이하며 그에 대한 신료들의 반응을 보고 장차 왕실에 위험이 될 만한 외척과 공신을 제거해 왕실의 권력을 강화해 나갔다.

세조도 1461, 1462, 1466년 세 차례 양위 파동을 일으켰다. 집권 8년차이던 1462년의 경우 신하들과 술을 마시다 갑자기 “세자의 학문이 크게 통달하여 장차 국사를 물려주고자 한다”고 했고 이에 영의정 정창손은 “전하의 말씀이 타당합니다”라고 답했다.

세조는 그날 밤 ‘정식으로’ 양위 선언을 했다. 신하들이 석고대죄를 했으나 세조는 “온 조정이 나를 싫어하기 때문에 정창손이 그렇게 말한 것”이라며 버텼다. 한명회 등 직계 공신들이 “역모 기운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서자 세조는 못 이기는 척 양위 발언을 거둬들이고 정창손을 직위 해제했다.

선조는 7년간의 임진왜란 동안 무려 15차례나 양위 파동을 일으켰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한 해에만도 5차례였다. 첫 양위 소동은 “전쟁 발발 55일 만에 전 국토를 유린당하게 한 무능한 임금은 물러나라”는 유생의 하야(下野) 촉구 상소가 발단이었다. 전쟁의 와중에서 주군을 바꿔 세울 수 없었던 신료들은 어쩔 수 없이 만류하느라 애를 먹었다.

조선 군주 가운데 가장 오래 집권한 영조는 재위 13년째인 1737년부터 수차례 양위를 선언했다. 선왕이자 이복형인 경종 독살에 영조가 관여했다는 소문이 돈다거나 노론과 소론 간 당쟁이 치열해질 때마다 정국 반전의 카드로 양위를 들먹였던 것.

양위 파동을 일으킨 군주들을 보면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면서도 정통성 문제에 시달렸던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쿠데타로 집권한 태종과 세조는 왕권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양위 선언을 활용했다. 선조는 전쟁 책임론을 불식하기 위해, 영조는 탕평책을 실현하기 위해 잦은 양위 파동을 일으켰다. 선조는 중종의 7번째 서자 덕흥군의 3남이었고 영조는 친모가 궁중의 잡일을 하는 ‘천인’ 출신이다.

약점 많던 이들 임금에게 ‘양위 선언’은 직(職)을 걸고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전략이었다고 할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또다시 퇴임을 시사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11월 28일 국무회의에서 “임기를 다 마치지 않은 대통령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한 것. 취임 직후인 2003년 5월 “대통령직 못해 먹겠다”는 말을 시작으로 임기 발언이 해마다 되풀이되고 있다.

대통령은 그 발언을 통해 소기의 정치적 효과를 거뒀을지 모르겠다. 지금은 절대군주 시대도 아니고 대통령은 국민이 선출한 ‘공직자’의 한 명이다. 국민을 대상으로 군주의 ‘양위 파동’을 연상하게 하는 듯한 행동을 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조수진 정치부 jin06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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