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러시아로 송출되는 북한 노동자의 현실은 이와 다르다. 이들은 ‘벼룩의 간’을 빼먹는 북한 노동당 간부들과 살고 있다. 러시아에서 일자리를 구할 때 두 달치 월급보다 많은 100달러를 북한 노동당 간부에게 상납하고, 북한으로 돌아갈 때 북한 영사관에서 벌어 온 돈을 뜯기는 일은 이제 ‘공식’처럼 됐다.
북한에서 송출된 노동자는 모스크바에서도 눈에 띈다. 모스크바의 한 교민은 최근 “일자리를 구해 주면 50달러를 주겠다”는 북한 노동자의 제의를 받고 깜짝 놀랐다. 이 노동자는 “러 극동 블라디보스토크로 노동자들이 셀 수 없이 몰려들어 일자리를 구하기 어렵고, 당 간부나 국가보위부 일꾼이 너무 많은 돈을 달라고 해서 모스크바로 왔다”고 털어놓았다고 한다.
북한 노동자는 불법 취업자에 대한 단속 현장에도 자주 나타난다. 경찰이 건설 현장을 덮치면 노동허가증을 보여 주는 북한 노동자의 모습이 러시아 TV에 종종 보인다.
이들은 평양에서 기차를 타고 두만강을 건너 블라디보스토크에 일단 내려 일자리를 찾는다. 연해주로 송출되는 북한 노동자는 올해 말 5000명을 채울 전망이다.
이달 10일 연해주에서 스킨헤드(극단적 민족차별주의 집단)로 추정되는 젊은이들에게 두들겨 맞아 숨진 노동자 2명은 ‘5000명 송출 시대’의 희생자들이다.
이 사건에 대한 나홋카 북한 총영사관의 대응은 북한 정권의 후안무치(厚顔無恥)를 그대로 보여 준다. 북한 총영사관은 러시아 언론에 노동자의 신상과 입국 경위를 숨긴 채 “사망자들이 모두 합법적 건설 노동자”라고 알렸다. 노동자들이 번 돈을 갈취하던 기관이 국가 빚 때문에 동원한 ‘합법 노동자’를 무슨 자랑거리라도 되는 양 홍보한 것이다.
북한이 만성적인 무역적자와 채무 불이행 때문에 러시아에 노동자를 송출하는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 북한 당국이 송출노동자에게 여권 발급 비용과 기차 요금까지 부담시키고 틈만 나면 돈을 뜯어 가는 것은 러시아인들도 잘 알고 있다.
이들의 송출 경위와 러시아 생활만 놓고 보면 중세 시대 각종 부역(賦役)에 동원됐던 ‘국가 노예’와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른지 분간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이들이 자발적인 의사에 따라 러시아행 기차를 탔으며, 뜯기고 남은 돈이라도 갖고 가기에 노예와는 다르다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북한의 배고픔과 국경을 넘는 ‘꽃제비’의 위험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송출노동자 생활을 선택했다. 수중에 남은 돈이 가족에게 돌아가리란 보장도 없다.
북한 정권은 이런 사정을 숨기며 노동자 사망 사건을 우발적인 사고로 위장하려 하고 있다. 국가 부채 때문에 수많은 노동자를 낯선 이국에 보내 스킨헤드가 날뛰는 도시를 배회하게 한 것은 북한 정권이다. 노동자 사망의 구조적 원인(遠因)은 북한 정권이 제공한 것이다.
최근 국가인권위원회는 북한의 인권 문제를 배제하기로 했다. 일부 정치인은 ‘북한 내정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로 국가인권위의 결정을 두둔했다.
그렇지만 남한의 정치인들은 해외로 송출되는 북한 노동자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고혈을 빨아먹는 북한 정권, 국제적 감시의 사각지대에 놓인 북한의 인권, 이들로 인한 민족의 수치(羞恥)를 언제까지고 외면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정위용 모스크바 특파원 viyonz@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