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을 북한의 통일전략 관점에서 보지 못한 것은 아둔한 탓이었다. 체제 유지용, 대미(對美) 협상용, 군사력 열세 보완용인 것까지는 알았지만 북의 통일전략의 근간임은 깨닫지 못했다. 단순화하면 이렇다. 핵무기를 개발해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인 후, 북-미(北-美) 평화협정을 체결해 주한미군을 무력화한 후 통일로 간다는 것이다.
이 같은 구상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해외 대변인 격인 재일 한국인 김명철이 자신의 저서 ‘김정일의 통일전략’(2000년)에서 이미 밝힌 지 오래다. 그런데 왜 몰랐던 것일까. 김대중(DJ), 노무현 정권으로 이어지는 대북 포용정책에 잠시 취했기 때문이다. 분단과 냉전에 대한 회한이 워낙 깊었기에 북과 화해 협력한다니까 앞뒤 안 가리고 몰려간 탓이다.
김 씨는 이 책에서 “김 위원장은 미국이 한반도에서 군사적 선택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면서 “북-미 간에 외교관계가 수립되고 평화협정이 조인되면 주한미군은 무력화, 중립화된다”고 분석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그의 말대로 돼 가고 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핵 문제가 해결되면 북한과 공동으로 6·25전쟁 종전 선언을 하자고 먼저 제안할 정도가 됐으니까.
김정일의 赤化의지 과소평가
우리 사회는 김정일의 대남 적화(赤化) 의지를 너무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다. 영화광에 호색한이라는 그가 통일에 대한 무슨 진지한 열정과 의지가 있겠느냐고 생각한다. 하지만 해나 아렌트의 말처럼 악(惡)은 언제나 평범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1995년 7월 김정일이 한 말이다. “나, 김정일은 조국통일을 위해 존재한다. 조국통일을 이루지 못하면 이미 김정일이 아니다.” 1998년에는 이런 말도 했다. “내가 조선통일의 주역이 되고, 통일조선의 최고책임자가 될 것이다.” 그가 통일조선의 대통령이 되는 데 가장 중요한 수단은 무엇일까. 바로 핵이다. 북핵의 실체적 의미가 여기에 있다. 북이 결코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핵의 위력은 벌써 나타나고 있다. 부시 행정부가 북한과 양자회담은 안 하겠다고 13개월이나 버티다가 결국 손들고 만 것부터가 핵의 힘이다. 핵을 통해 미국을 끌어들이겠다는 북의 1단계 전략이 성공한 것이다. 다음 단계는 북-미 평화협정 체결이다. 아직은 ‘선 핵 포기, 후 평화체제 논의’라는 미국의 방침이 확고해 보이지만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개발한 핵은 용인하고 추가 생산과 이전(移轉)은 안 한다는 선에서 타협할 수도 있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핵우산 해제와 북의 핵 포기를 맞바꿀 수도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DJ와 같은 사람들은 북-미 직접대화가 유일한 해법이라고 한다. 북-미가 어떤 합의를 할지도 모르고, 합의에 따라서는 한미동맹이 해체될 수 있는데도 이런 주장을 한다. 북-미 대화가 잘돼 북이 핵을 포기한다고 해도 천문학적 수준이 될 그 대가(代價)는 결국 우리가 지불해야 한다. 그렇게라도 해서 북이 영원히 핵을 포기한다는 보장만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1%도 없다. 어쩌다가 이 꼴이 됐는가.
核에 기초한 北통일전략 안 변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핵이 김정일의 통일전략의 시작이자 끝임을 일찍이 간파하지 못하고 대미 협상용 정도로 생각했던 정책적 오판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DJ는 물론 노 대통령도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핵이 자위용이라는 북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는 현실과 동떨어진 발언으로 지난 4년을 허비한 책임이 결코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의 인식은 아직도 바뀌지 않은 듯하다. 그제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에서 한 발언을 보면 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알고나 있는지 의심이 들 정도다. 대통령 말대로 안보는 조용히 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위기의 실체조차 덮어 둘 수는 없는 일이다. 6자회담이 다시 열린다고 해도 핵에 기초한 북의 통일전략은 바뀌지 않는다. 송년 덕담 대신 이런 말을 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비극적 현실이다.
이재호 수석논설위원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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