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육정수]盧일병의 軍생활 그 후

  • 입력 2006년 12월 24일 19시 36분


‘노무현 일병’이 동료 병사와 닭싸움하는 장면을 신문에서 본 적이 있다. 대통령 당선 다음 날인 2002년 12월 20일자 동아일보 A6면이었다. 그 사진이 다시 보고 싶어 본보 데이터베이스(DB)를 뒤졌다. 닭싸움 사진 외에 철모를 쓰고 총을 멘 ‘단독군장(軍裝)’ 모습, 동료를 어깨에 무동 태우고 활짝 웃는 모습, 먼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모습, 부대 밖 다리 위에서 취한 포즈 등 5장을 찾아냈다.

노 일병 사진을 처음 대했을 때처럼 이번에도 뭔가를 찾아보려고 한참 살폈다. 장교나 하사관이 아닌 사병(士兵)이었지만 어딘가 범상하지 않은 면이 있을 거라고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미래의 대통령이 될만한 ‘특별한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다. 동료 2명과 함께 다리 위를 걸으며 찍은 모습이 좀 특이했다고나 할까. 동료들과는 달리 털모자를 삐딱하게 쓴 채 장난스럽게 웃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문득 노 일병 사진을 떠올린 것은 “군복무는 썩는 것”이라고 한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회에서의 발언 때문이다. 그는 “군대에 가서 몇 년씩 썩히지 말고 그동안에 열심히 활동하고 장가를 일찍 보내야 아이를 일찍 낳을 것 아니냐”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군대생활을 어떻게 했기에 그런 군복무관(觀)을 갖게 됐을까.

한국남자는 세 명만 모이면 군대 얘기를 한다고 한다. 대부분은 과장된 것으로 좌중을 웃기거나 자신이 군대에서 ‘잘나갔다’고 뽐내기 위한 얘기들이지만 거기에는 자부심이 깔려 있다. 추억을 나누다 보면 “군대에서 썩었다”고 푸념하는 사람도 많지만 이런 자리에선 그 말을 해도 문제되지 않는다. 병영(兵營)이 부모 슬하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군 생활은 젊은이들에게 사회성, 인내력, 리더십과 애국심을 길러준다. 설혹 그런 보상이 없더라도 군대는 썩는 곳이 아니라 나라를 지키는 곳이다.

대통령의 ‘썩는다’는 발언은 현역 예비역 전체에 대한 모욕이고 군의 사기를 떨어뜨린 ‘말 폭탄’이다. 국가원수이자 군통수권자의 공적(公的) 발언으로 용납될 수 없다. 또 언론, 즉 국민이 보는 앞에서 문제의 발언을 감행했다는 사실은 내년 대선 승리를 노린 ‘베팅’(도박)이 아니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청와대 국방부 등의 뒤이은 발표나 관계자의 얘기도 그걸 뒷받침한다.

‘군복무 단축 검토중’ ‘내년 상반기 단축방안 발표’ ‘모병제(募兵制)를 제외한 모든 방안 검토’ ‘독일식 사회복무제 검토’ ‘유급(有給)지원병제 도입’ 등 잇따른 뉴스를 따라잡기도 벅차다. 현 정권은 3년 전 군복무기간을 2개월 단축한 바 있고, 내년엔 현재 24∼27개월인 육해공군 사병의 복무기간을 최대 6개월까지 줄일 수도 있다고 한다. 2011년 실시할 계획인 유급지원병제는 작년과 올해 이미 두 차례나 발표한 것을 재탕 삼탕하는 것이다. 여차하면 그동안 소문으로만 떠돌던 모병제까지 선거카드로 들고 나올지 모른다.

입대나 신체검사를 앞둔 젊은이와 그 부모에겐 달콤한 사탕이다. 전투능력 습득 및 병역자원 고갈 여부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닌 듯하다. 더구나 내년 대선에선 19세 이상이 투표권을 갖는다. 젊은층 표를 노린 ‘한탕주의’ 선거전략임에 틀림없다. 권력에 눈이 어두워 안보까지 흔드는 집단에 절대로 이 나라의 운명을 맡길 수는 없다.

육정수 논설위원 soo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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