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눈/이승헌]비판을 ‘악의’로 느끼는 공정위

  • 입력 2006년 12월 28일 03시 05분


26일 오후 9시 반경 정부과천청사 주변의 한 음식점. 공정거래위원회 출입기자들과 저녁식사를 겸한 송년 간담회를 하던 권오승 위원장이 약 5분간 마무리 발언을 했다.

“(중략) 언론 보도와 관련해 비판적이지만 건설적인 보도는 수용하겠지만 악의적으로 보도한 것에는 악의적으로 대응하겠다. 올해까지 내가 좀 순진했지만 내년부터는 더는 순진하지 않겠다.”

공정위는 권 위원장의 ‘악의적 대응’ 발언이 27일 본보를 통해 보도되자 ‘불끄기’에 부심했다. 이왕 나온 말을 부인할 수는 없었는지 “애정을 갖고 하는 건설적 비판은 얼마든지 수용하겠지만 악의적 보도에 대해서는 적극 대응해 나가겠다는 취지의 발언”이라는 해명자료도 냈다. 하지만 서울대 법대 교수 출신 위원장의 입에서 나온 ‘악의적 대응’이라는 살벌한 표현은 이날 하루 기업과 관가(官街)에서 큰 화제가 됐다.

사전에서 ‘악의(惡意)’를 찾아봤다. ‘나쁜 마음’ ‘좋지 않은 뜻’으로 나와 있었다. 그럼 권 위원장이 밝힌 악의적 보도는 무슨 뜻일까.

중앙대 이상돈(법학) 교수는 “고의나 중대한 과실이 있으면 ‘악의적 보도’로 보는 미국과 달리 한국에서는 보통 강한 비판 보도가 악의적 보도로 이해된다”고 말했다. 권 위원장이 밝힌 악의적 보도도 오보(誤報)보다는 공정위에 대한 비판적 보도로 보인다.

실제로 공정위는 최근 몇 달 동안 각종 정책 및 윤리 문제와 관련해 잇달아 물의를 빚으면서 여론의 비판을 받았다. △전현직 공정위 공무원들이 다단계업체인 제이유그룹과 연루된 의혹 △현대·기아자동차그룹 부당내부거래 조사를 나갔던 공정위 직원들이 금품과 향응을 받은 사건 △상금까지 내건 신문 판매 관련 수기(手記) 공모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사건은 모두 공정위가 자초했지, 언론이 없는 것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공정위 내에서는 ‘위원회 창설 후 최대 위기’라는 말도 나온다.

권 위원장이 밝힌 ‘악의적 보도에 대한 악의적 대응’도 주목된다. 앞으로 공정위를 비판하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악의적 대응’ 방향도 어느 정도 예상된다. 우선 현 정부가 자주 사용해 온 언론중재위원회 중재신청이나 소송을 생각할 수 있다. 또 마음에 안 드는 일부 매체에 대한 선별적 조사로 옥죄는 방법도 빠지지 않을 것이다. 이미 공정위는 12월 한 달 동안 무가지 및 경품 제공에 대한 경험을 적은 수기를 공모하면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물론 한 조직의 수장(首長)으로서 권 위원장이 요즘 느끼는 위기의식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지금 공정위가 직면한 어려움은 공직자 윤리 추락과 권력에 대한 굴종으로 스스로 불러 온 측면이 훨씬 더 강하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권 위원장과 공정위는 ‘악의적 보도에 대한 악의적 대응’식의 막가는 발상으로 문제를 호도하지 말고 왜 사면초가(四面楚歌)로 몰렸는지 진지하게 되돌아봤으면 한다.

이승헌 기자 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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