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도 걱정스러운 것은 이 나라를 국가공동체, 사회공동체로 지탱해 온 온갖 불문율이 다 깨져 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국민은 속수무책이라는 점이다. 올해 대선이나 제대로 치를 수 있을지, 내년이면 환갑을 맞는 대한민국이 앞으로도 계속 번영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를 걱정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그것이 헛된 기우만은 아니다. 햇볕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한 후 6, 7년 사이 우리 사회 내부에서, 그리고 우리의 국제관계에서 일어난 엄청난 변화를 보자. 대한민국은 이제 세계가 부러워하는 믿을 만한 이웃이 아니라 북한을 닮아 가는 예측불가의 나라이다. 만약에 정치권이나 지식인 세계가 지금까지와 같은 독선과 환상, 그리고 위선에 빠져 안일하고 무책임한 말들로 국민을 호도하고 국민마저 무력감에서 허덕인다면 이 나라는 단순히 선진화의 문턱에서 좌절할 뿐 아니라 식민지 상태 못지않은 정치적 노예 상태나 극심한 무정부 상태로 빠져 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대한민국의 위기, 무책임한 권력
‘어떻게든 전쟁은 피해야 한다’는 구실 아래 지금까지처럼 북한에 대해서는 할 말을 하지 못하고 국제사회에서 고립을 자초할 정도로 그들의 요구에 끌려 다니는 상황이 계속되다 보면 연방제 통일안을 수용하라는 요구가 나올 것이 뻔하다. 또 평화통일이라는 미명으로 그것을 덜컥 수용한다면 우리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의 주권을 포기하는 격이 될 것이다. 민주주의체제가 독재체제와 혼합된다면 결과는 독재이지 민주주의가 될 수 없다. 이는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진정으로 투쟁해 본 사람에게는 설명이 필요 없는 일이다.
이러한 거족적 불행을 막는 데는 국민의 주인의식을 일깨우는 길밖에 다른 것이 없다. 불운이 닥칠 때 분연히 일어서 맞서는 ‘힘이 없으나 건실한 다수의 뭉친 힘’이 오래전부터 변함없이 추진되어 온 북한 정권의 대남 적화통일 계책을 막을 수 있다. 사실 권력이고 돈이고 지식이고 가진 것이 있는 사람들은 상황이 불리해지면 말을 바꾸거나 떠나 버리면 그만인 객(客)들이고 이 땅에 끝까지 남아 주인으로 책임지고 살아야 할 사람들은 힘없는 평범한 국민이다. 평소에는 이들이 힘이 없는 듯 보이지만 만약에 자기의 자식과 손자들이 북한 같은 체제에 갇히게 되는 큰 위험이 닥쳐 오고 있음을 감지한다면 놀랄 만한 지혜와 용기를 발휘해 굳건히 맞선다.
올해는 마침 국민이 주인임을 공식으로 재확인하는 대통령선거가 있는 해이다. 이제 정말 중요한 것은 국민이 주인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게 언론이 앞장서는 일이다. 국민은 각 후보나 정당들이 갖고 있는 국정의 큰 그림이 어떤 것이고 어떤 자질을 가진 사람들이 그 주변에 모여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대선의 해 주인으로 우뚝 서자
북핵 문제뿐 아니라 대북정책 전반에 대해서는 어떤 대안을 갖고 있는지, 안보와 국제관계에 대한 인식은 어떤 것인지, 자유와 평등의 이상을 함께 구현하는 방법으로서 그들이 구상하고 있는 경제 복지 교육정책은 어떤 것이고 그것이 실현될 수 있는 현실적 가능성은 어느 정도인지를 따져야 한다. 선심 공약에 현혹되거나 선거 전야(前夜)에 연출되는 광기에 휘말리는 일이 또다시 일어난다면 국민은 주인으로 우뚝 서는 대신 땅을 치고 통곡을 해도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이 땅에서 맞을 것이다.
국민이 주인임이 증명되는 것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이다. 대한민국 그리고 한반도의 위기는 이미 충분히 무르익었다. 이제 절실히 필요한 것은 과거사의 족쇄나 추상적 어휘들의 횡포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며 미래를 설계하는 성숙성이다.
이인호 객원논설위원·명지대 석좌교수 posolee@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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