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기자를 맞은 호르헤 파스세토 전 국제언론인협회(IPI) 회장의 말이었다. 간단한 이 한마디가 혼란스럽던 기자의 머릿속을 명쾌하게 정리해 주었다.
남미에서 마주친 포퓰리스트들에게는 형식뿐인 ‘국민에 의한(by the people)’, 구호만의 ‘국민을 위한(for the people)’ 정치가 있었을 뿐 진정한 ‘국민의(of the people)’ 정치가 실종돼 있음을 일깨워 준 것이다.
지난해 말 브라질 상파울루에 도착했을 때 기자가 떠올린 포퓰리스트의 정의란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선심성 공약을 남발하는 정치인’이라는 단순한 것이었다. 그러나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로 발길을 옮기면서 차츰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됐다.
국민의 일원인데도 소외돼 온 빈곤층을 포퓰리스트는 정치참여 세력으로 만들었다. 민주주의란 국민이 권력을 스스로 행사할 수 있는 제도다. 그렇다면 따돌림을 받아 온 대다수 가난한 국민을 깨어나게 한 아르헨티나의 후안 페론을,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를 포퓰리스트라고 비난만 할 것은 아니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취재가 진행되면서 차츰 갈피가 잡혀 갔다. 기본적 인권, 다수결의 원리, 법치주의…. 이 같은 민주주의의 정의에서 ‘다수결의 원리’를 제외하면 포퓰리스트에겐 들어맞는 대목이 없었다. 지키지도 못할 공약으로는 빈곤층의 생활을 개선할 수 없었던 것이다.
멕시코 외교부 장관 출신인 호르헤 카스타네다 뉴욕대 석좌교수는 중남미의 좌파를 ‘과거 되풀이형 포퓰리스트 좌파’와 ‘과거의 교훈을 깨달은 뉴레프트 좌파’로 구분했다. 대중의 인기 유지를 위해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차베스와 아르헨티나의 네스토르 키르치네르는 전자에, 반면 분배 중심의 좌파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시장경제의 틀을 지키기 위해 포퓰리즘 공약을 버리고 변신한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칠레의 미첼 바첼레트는 후자에 속한다. 과거의 교훈을 깨닫고 스스로 변한 좌파는 중남미의 현실적 대안으로까지 떠오르고 있었다.
상파울루 가톨릭대에서 만난 학생들도 룰라의 변신을 거론했다. 소득 재분배를 통한 사회변혁을 기대했던 한 학생은 대통령이 된 뒤 ‘지나치게 변한’ 룰라가 실망스러운 듯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룰라의 ‘인기 없는 면’이 결과적으로 그를 살리고 브라질의 진정한 변화를 향한 동인으로 작용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지도자가 사회 통합을 이끄느냐 국민을 분열시키느냐에 따라 국가의 안정성이 달라진다는 사실에는 예외가 없는 모양이다. 자신의 이익만 챙겼던 무책임한 과거 지도층이 한 방향만 바라보았듯이, 빈곤층만 바라보는 포퓰리스트 역시 나라를 대립과 갈등의 골로 몰아넣을 뿐이었다.
카라카스의 정치집회에서 만난 야당 관계자 안드레센테 디 카라카스 씨의 말은 그런 점에서 깊은 여운으로 남는다.
“빈곤층을 돌보지 않았던 전 집권층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차베스도 나라를 한쪽 방향으로만 끌고 가선 안 된다. 국민 전체를 염두에 둬야 한다.”
김영식 국제부 spe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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