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이후 비정규직이 폭발적으로 늘어나 은행권의 30%, 전체 근로자의 36%가 비정규직이다. 한국자산관리공사, 한국금융안전 등 공공금융 부문에서는 비정규직 수가 정규직을 넘기도 했다. 문제가 더는 두고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국회는 작년 11월 비정규직 관련 3법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7월로 예정된 법률 발효를 앞두고 우리은행이 “계약직 3100명 전원을 정규직화하겠다”고 최근 밝혔다. 정규직 전환은 전 금융권으로 확산될 조짐이며 제조업계도 영향을 받게 됐다. 고용 형태와 관련해 거대한 ‘새판 짜기’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일단 판짜기가 끝나면 중대 변수가 새로 나타나지 않는 한 그대로 간다. 그래서 판을 한번 잘못 짜면 후유증으로 두고두고 고생한다. 이번 판짜기에는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 ‘차별이 고착되지 않도록 하되, 경제에 부담을 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비정규직의 핵심 문제는 고용불안과 차별이다. 그러나 둘을 한꺼번에 풀려고 하면 기업이 견디지 못한다. ‘차라리 비정규직을 모두 잘라 문제의 씨앗을 없애 버리자’는 유혹을 받게 된다. ‘대학살’이라는 가장 슬픈 시나리오다. 공기업이나 지방자치단체에서는 벌써 재계약 거절 등 비정규직 해고가 벌어지고 있다.
대부분의 비정규직은 우선 고용불안부터 해소되길 원한다. 우리은행도 이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정규직 전환자들이 차별을 받아들여야 한다. 직군제(職群制)를 도입하고 임금체계를 연공급(年功給)에서 직무급으로 바꿔 정규직 전환자의 임금을 현 수준으로 유지하면 기업에 주는 충격을 줄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차별을 영구화하는 방식으로 제도를 운용하면 안 된다. 합리적 직무분석을 통해 직군별 임금 격차를 좁혀 가는 한편, 직군 전환의 기회를 넓게 열어 둬야 한다.
기존 노조의 양보가 성패(成敗)를 가르는 열쇠다. 이번에 우리은행 노조가 임금 동결을 수용한 것도 이런 취지겠지만, 임금 감축 등 더 큰 희생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보다 해고가 유연해져야 한다. 물론 이를 위해 정부는 재취업 시장과 재교육을 활성화해야 한다. 기업이 해고권을 갖되 여건이 좋아지면 해고 근로자를 우선 채용하는 ‘일시귀휴제’의 도입도 괜찮다. 금융노조연맹 고위 관계자조차 “우리가 먼저 말을 꺼내기는 힘들지만 정규직 노조의 결단 없이는 해법이 없다”고 말한다.
기득권을 내놓는 일에 어찌 반발이 없겠는가.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 보시라. 노동운동의 기본철학은 “그동안 사용자 측이 지나치게 많이 차지했다. 이젠 정상화하자”는 것 아닌가. 비정규직 문제에도 같은 논리를 적용해 보자. ‘그동안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의 몫을 너무 많이 가로채 왔다. 이제 바로잡아 보자’고….
허승호 논설위원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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