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9단’ 변신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았다

  • 입력 2007년 1월 20일 03시 01분


고 전 총리의 대선 도중하차는 건강 문제(폐렴) 등을 떠나 관료나 학자 출신 등 비(非)정치권 인사들이 권력투쟁에서 살아남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전문가들도 개인적인 편차는 있지만 관료 출신이 현실 정치의 벽을 성공적으로 넘기에는 여러 어려움이 있다고 지적한다.

○ 정치 9단과 행정 9단의 차이

고 전 총리와 같은 고위 관료나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뤄 저명해진 사람들은 정치권으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들은 대체로 권력 자체에 대한 강한 욕망을 갖고 있다기보다는 ‘권력의 추’가 어디로 이동하는지에 더 관심이 많다고 한다. 정치판에 뛰어드는 계기도 ‘수동적’이다.

주로 대선이나 총선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에 스카우트돼 급작스레 뛰어드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정치권은 이들을 영입하기 위해 여러 찬사를 늘어놓기 마련이다. 그런 소리가 반복되면 생각이 없던 사람들도 “한번 해볼까” 하는 마음이 생긴다고 한다.

고 전 총리도 사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 이전에는 대권에 대한 뜻이 없었던 듯하다. 대통령 권한대행 시절 안정적인 국가 지도자 이미지를 구축한 후 그해 9월 여론조사 지지율이 30%를 웃돌기 시작하면서 주변에서 ‘대선에 나서야 한다’는 강한 권유가 줄을 이었고, 고 전 총리도 비로소 대권에 대한 의지를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부인 조현숙 씨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여론조사에서 계속 지지율 1위를 했고 주변에서 권유를 많이 했기 때문에 시작했지만 (대선에) 크게 의욕을 가진 건 아니었다”고 말한 것도 이 같은 추론을 뒷받침한다.

고 전 총리는 30대에 전남지사를 거쳐 장관, 서울시장, 국무총리 등을 두루 지낸 탁월한 관료였다. 자타가 공인하는 ‘행정 9단’이었다. 그러나 ‘정치 9단’으로의 변신은 결국 실패로 끝난 셈이다.

전문가들은 이 대목에서 관료와 정치인의 차이를 강조한다. 관료들은 특정한 사안을 주도하기보다는 정치적으로 결정된 사항을 집행하는 역할을 주로 하기 때문에 수동적인 반면 정치인은 스스로 여론을 만들어 가고 이슈를 창출하는 적극성과 능동성이 요구된다는 얘기다.

숭실대 강원택(정치학) 교수는 “물론 개인적인 차이가 있지만, 관료 출신의 주요 자질 가운데 하나가 안정성이다. 정책을 집행하는 데 무리한 결과가 나오지 않아야 하고 정해진 틀에 벗어나는 행동은 자제하도록 요구받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정치가는 때때로 통념을 뛰어넘는 상상력과 추진력을 요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분석했다.

○ 프로와 아마추어

고 전 총리의 낙마를 보면서 1996년 1년 동안 국무총리를 지내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신한국당 대표로 정치판에 영입됐던 이홍구 전 총리를 떠올리는 이가 많다.

저명한 학자 출신인 이 전 총리는 1997년 초 여론조사에서 10%가 넘는 지지를 받았고 김대중 전 대통령-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의 이른바 ‘DJP 연합’보다 당선 가능성이 높게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신한국당 내 후보 경선에 들어가면서 지지율이 하락하기 시작하자 버티지 못하고 결국 그해 6월 9명의 경선 후보 중 유일하게 도중하차했다.

서울대 총장 출신인 이수성 전 총리도 당시 신한국당 경선에 도전했으나 5위에 그쳤다. 그는 학자이면서도 ‘정치적 기질’을 갖춘 인물로 평가됐으나 정치판에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경제부총리와 한국은행 총재를 지낸 조순 전 서울시장도 1997년 민주당 총재 시절 대선 출마를 선언했으나 낮은 지지율의 벽을 넘지 못하고 도중하차했다. 신한국당과 민주당의 합당 후 한나라당 총재를 맡기도 했으나 이회창 후보의 1997년 대선 패배 후 사실상 당에서 내몰렸다.

중도 포기한 이홍구 전 총리나 조순 전 서울시장은 물론이고, 경선에 끝까지 도전했던 이수성 전 총리도 얼마 안 가 정치판을 떠났다.

하지만 프로 정치인은 다르다. 질 게 뻔한 경선, 질 게 뻔한 선거에도 ‘할 수 있다’는 의지를 갖고 도전하기 일쑤다. 한번 실패했다고 해서 정치판을 떠나지 않는다.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특히 대선 도전에는 ‘프로’의 끈질긴 승부근성이 필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정치자금 문제도 비정치인이 버티기 힘든 주요 요인 중의 하나다. 고 전 총리가 신당을 만들지 못하고 조기에 포기한 이유 중에는 정치자금 문제도 있다는 게 측근들의 전언이다.

조순 전 시장도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몇몇 민주당 당직자에게서 “전국에서 지구당위원장이 올라오는데 떡값을 돌려야 한다”는 ‘주문’을 받고 “내가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나” 하며 깊은 회의에 빠진 일이 있었다고 한다.

○ 미국도 관료 출신 희귀

미국도 관료 출신 대통령은 찾아보기 힘들다. 일찍부터 정치를 시작한 주지사 출신이 많다. 39대 지미 카터(조지아 주지사) 대통령, 40대 로널드 레이건(캘리포니아 주지사) 대통령, 42대 빌 클린턴(아칸소 주지사) 대통령, 43대 조지 W 부시(텍사스 주지사) 대통령이 모두 주지사 출신이다.

연방제인 미국에서 주지사는 독립적인 리더십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성공한 주지사는 대통령의 능력을 검증받은 것으로 인식된다.

최근 30년간 미국 대통령 가운데 관료 출신은 유엔 주재 대사와 중앙정보국 국장을 지낸 41대 조지 부시 대통령이 유일하다. 그러나 그도 1959년 공화당에 입당해 텍사스 주 하원의원을 지낸 뒤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발탁으로 행정직을 맡은 경우이며 정통 관료는 아니다.

이들과 함께 선거를 치렀던 상대당 후보 중에도 관료 출신은 없다. 2004년 대선 때 부시 대통령과 맞섰던 민주당의 존 케리 후보는 매사추세츠 주 부지사 출신이다.

경희대 임성호(정치학) 교수는 “미국은 의원 후보도 중앙당이 하향식으로 공천하지 않고 유권자 선거에 따라 정해지기 때문에 ‘영입’이라는 말이 흔치 않다”며 “우리나라도 미국처럼 명실상부한 지방자치가 이뤄지면 지방자치단체장들의 대선 도전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용관 기자 yongari@donga.com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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