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 카페]눈 가리고 아웅式 ‘기업 숫자게임’

  • 입력 2007년 1월 31일 03시 00분


신문기자는 근무하는 부서나 출입처가 바뀌면 직업이 달라진 것과 맞먹는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제가 요즘 그렇습니다. 입사 이후 사회부(4년) 정치부(5년) 등에서 주로 근무하다가 이달 초부터 ‘낯선 경제부’에서 일하고 있으니까요. 1단짜리 기사를 붙잡고 끙끙대기도 하고 새로운 환경과 취재원을 접하면서 등에서 식은땀이 날 때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저에게 이달 초 대기업의 한 간부가 ‘격려차’ 조언을 해 주더군요.

“처음 와서 힘들죠. 경제부 기자 잘하려면 ‘숫자’에 속으면 안 돼요.”

다른 부서에서 일할 때 기사의 객관성을 높이는 주요한 도구라고 믿어 왔던 숫자(통계)에 속지 말라니…. 하지만 쏟아지는 자료 속에서 한 달을 지내다 보니 그 의미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굴지의 대기업 A사는 지난해 4분기(10∼12월)에 수백억 원의 영업적자를 봤습니다. 그런데 보도 자료 제목은 ‘2006년 매출 ○○조 달성’이었습니다. 4분기의 부진한 숫자는 숨기고 그나마 괜찮은 종합성적을 앞세운 것이지요. A사 홍보 담당자들은 “4분기 실적보다 2006년 매출을 보도해 달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그들도 ‘눈 가리고 아웅’이란 걸 잘 압니다. 모든 숫자는 공시를 통해 낱낱이 공개되니까요. 그래도 어떤 숫자가 보도되느냐가 직원들의 사기, 소비자나 투자자들의 심리에 영향을 준다고 하네요.

‘1위’라는 숫자도 다시 보게 됐습니다. 제가 정치부에서 취재했던 대통령선거나 국회의원선거에서는 늘 1등이 1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업에서는 1등이 여럿이더군요. 소니는 19일 ‘지난해 미국 TV 전체 시장에서 판매량과 판매액 1위’라고 미국에서 밝혔습니다. 그로부터 열흘 뒤인 29일 ‘또 다른 1등’이 서울에서 발표됐습니다. 삼성전자는 보도 자료를 내고 ‘2006년 미국 디지털TV 1위’라고 했습니다. 누가 ‘진짜 TV 1등’일까요.

어느 기업이나 정부기관도 거짓 통계를 근거로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자신들에게 유리한 기준의 유리한 숫자를 내세우는 것이겠지요. 수치(數値)에 익숙해지되 그 이상까지 파악할 수 있는 안목을 키워야겠다는 다짐을 해 봅니다.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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