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인호]公職이 먹을 자리인가

  • 입력 2007년 1월 31일 03시 00분


노무현 대통령은 인수위 시절 ‘국민이 대통령입니다’라는 구호를 사방에 써 붙여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얼마 안 가 “대통령 못 해 먹겠다”고 해 또 한번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당시엔 국민의 환심과 동정을 사려는 속 보이는 장난이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모든 공직을 어려운 일 ‘해내야 하는’ 자리라기보다 ‘해 먹을’ 자리로 보는 그의 정치관을 여과 없이 드러낸 말들이었다.

그래서 대통령직도 나누어 준다면 국민이 좋아할 줄 알았고 그래서 그렇게 철저하게 끼리끼리 ‘해 먹는’, 이른바 ‘코드인사’를 한 것이다.

어떤 집권세력이건 이념이나 통치철학이 맞는 사람들로 권력체계를 구축하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것이 바로 정치를 하려는 이유다. 그러나 자기들의 권력을 극대화하고 영속화하기 위해서라도 고도의 생산성이 요구되는 각료나 큰 기관장 자리는 각 분야의 우수 인재를 널리 수소문해서 여론의 검증을 거친 후에 기용하는 것이 상식이다.

무섭고 부패했던 군사독재 시절에도 요직에 발탁되는 사람들은 교육이나 경륜으로 보아 탁월하게 유능함을 국민 대다수가 인정하는 인물이었다. 그 때문에 한편으로 독재와 부패가 판을 쳤어도 나라 전체는 발전하고 민생은 주름을 펼 수 있었다. 장군 출신들은 자신들을 위해서라도 탁월한 능력을 가진 민간인 전문가들을 활용할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속 보이는 ‘끼리끼리 코드인사’

민주화에 공로를 세웠다고 도덕적 자만에 빠진 이른바 진보세력의 큰 맹점은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구분할 줄 모른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유능해도 지금까지 해 먹은 기득권 세력은 물리쳐야 한다’는 게 다른 것은 공부할 겨를이 없이 계급투쟁론에만 오래 솔깃해했던 그들의 단순논리이다. 교육을 잘 받고 유능한 것도 ‘부의 대물림’에서 온 것이라는 게 나라 밖은 한 치도 바라볼 줄 모르면서 모든 공직을 먹을 자리로만 보는 그들의 논리요 정의관이다.

공직이 먹을 자리가 아니고 일하는 자리임을 안다면 반대의 논리가 더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 곧 “너희들은 탁월한 능력을 타고났고 좋은 교육의 혜택을 받았으니, 크고 어려운 나랏일을 맡아 효율적으로 해냄으로써 그만한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도 행복하게 잘사는 나라를 만들어 사회에 대한 빚을 갚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공직자들이 그 기대에 못 미치면 가차 없이 내치고 벌을 줄 수 있으며 그것이 바로 모든 선진국, 특히 싱가포르 같은 나라가 취하는 방식이다.

우리나라에서 ‘낙하산 인사’나 ‘위인설관’이 비단 노 정부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과거에도 간접적으로 청탁과 압력을 넣거나 최종 결정된 후보를 정치적 이유로 거부하는 사례는 종종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임명권’을 강조하는 현 정부의 인사독재는 훨씬 노골적이고 적극적이다. 못마땅한 인사를 거부하는 정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목하는 인사를 앉힐 때까지 집요하게 추구한다는 데 특징이 있다.

형식으로는 외부인을 포함하는 인사위원회가 후보를 복수로 추천하게 되어 있어 전보다 민주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선발된 복수후보 가운데 청와대가 염두에 둔 후보가 들어 있지 않으면 배수를 3배, 심지어 5배까지 늘려 추천하라는 파렴치한 주문이 내려간다. 인사위원회나 청와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주무 부서장은 공정인사의 허울을 입혀 주는 들러리가 될 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인사위의 검증을 통과할 자격이 전혀 되지 않는 사람도 ‘코드’에 맞기만 하면 아무 자리라도 넘보고 또 실제로 차지하기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학술 문화계의 세계 최고 권위자들을 상대로 문화외교를 하고 나라의 브랜드 가치를 드높이는 것이 주 임무인 자리에 영어로 간단한 자기소개도 하지 못하는 인사를 ‘비외교관 출신에 대한 배려’라는 우스운 명분으로 밀어 넣으려 한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다. 그것이 제발 헛소문이길 바란다.

노골적 인사독재 그 끝은 어디

우리는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를 지향하는 나라다. 참여민주주의도 그런 이상(理想)의 한 표현에 불과하다. 하지만 아무리 민주주의가 잘된 나라에서도 모든 국민이 다 요직에 앉을 수는 없고 그것이 평등도 아니다. 일자리는 능력에 따라 배분해야 선거권 행사를 통해 참여하는 대다수 보통시민이 노동권을 보장받고 사회복지의 하한선이 계속 높아 가는 활력 있는 사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인호 객원논설위원·명지대 석좌교수 posolee@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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