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길이 바쁜 원정대는 이곳 라브렌티야에 도착하자마자 예정됐던 훈련도 생략하고 곧바로 베링해협을 건널 예정이다. 그런데 러시아 국경수비대가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출국을 막고 있다. 삼일절이란 뜻 깊은 날을 맞이해 전격 출발하려던 원정대의 작은 소망은 여지없이 깨졌다.
뿐 만 아니다. 기다리는 동안 개수면(유빙이 없는 열린 바다)이 있는 곳까지가서 짜투리 훈련이라도 하려했지만 국경수비대는 우리 원정대가 이곳 라브렌티야 마을까지 들어오는 것만을 허가했기 때문에 마을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 통보를 해왔다.
사실상 감금이나 다름이 없다. 우리 대원들이 동네 산보라도 할려고 하면 기관원이 따라 붙는다. 아나디리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지난달 25일 창고에서 썰매를 꺼내 훈련을 나가려고 하니 어떻게 알았는지 기관원이 “지금 출발하려고 하느냐?”고 연락을 해왔다. 알고 보니 창고에 달린 폐쇄회로 카메라로 감시를 하고 있었던 것.
“우리가 간첩이냐?” “제발 바람 좀 쇄자” 반협박과 애원이 통했는지 이날 오후 기관원이 동행하는 조건으로 이곳 라브렌티야에서 자동차로 1시간30분 거리에 있는 추크치족 마을 방문 허락이 떨어졌다.
끊임없이 펼쳐진 설원을 지나 바람 때문에 거친 돌덩이들이 그대로 지난 툰드라 지역을 달려 추크치족 마을에 도착했다. 여우털 모자를 쓴 개구쟁이 동네 꼬마들이 몰려나와 반가워 한다. 역시 어디든 어린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미소는 사람들을 무장해제 시킨다.
늑대와 여우 털 가공소와 물개고기 저장소를 돌아봤고 개썰매도 구경했다. 손과 발이 영하 25도의 추위에 꽁꽁 얼어 통증이 왔지만 오랜만에 바깥나들이에 모두들 즐거워했다. 단 한사람 박영석 대장만 빼고..
박대장은 빨리 출발하지 못하는 것이 영 불만인지 표정이 어둡다. 좀처럼 볼 수 없는 추크치족의 모습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 빨리 돌아가쟈고 성화다.
도대체 러시아 국경수비대는 왜 원정대를 출국시키지 않는 것일까?
이유는 이렇다. 미국 국경수비대로부터 우리 원정대가 들어와도 좋다는 공식문서를 전달받아야하는데 이게 해결이 안됐다는 이유다.
원정대는 미국 국경수비대의 공식 레터가 있어야한다는 사실을 이번 원정 대행을 맡고 있는 드리트리 슈파로 씨로부터 26일에야 통보받았다. 그는 우리보고 “공식 레터를 꼭 받아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아풀싸.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 알아보니 슈파로 씨는 이를 이전부터 알고 있었고 지난 21일 미국 국경수비대로부터 ‘우리는 공식 레터를 발송한 예가 없다’는 답을 받았단다. 행정 수속 대행을 맡은 자신이 일을 해결할 수 없자 이를 원정대에 떠넘긴 것이다.
추크치 마을 방문을 마치고 난 늦은 오후 박영석 대장은 대행사 직원 니콜라이와 대면하자마자 노발대발했다. “이는 대행사 너희들이 풀어야하는 문제인 데 이런 식이면 곤란하다. 빨리 해결하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서 일까? 모스크바에 있는 슈파로 씨가 늦은 밤 원정대 본대엔 연락하지도 않고 미국 알래스카 놈에 있는 제2 베이스캠프의 최미선 매니저에게 전화 연락을 해 여러 가지 서류를 다시보내 달라고 연락했단다.
일이 참 이상한데서 꼬인다. 오늘이 벌써 원정대가 출발(2월16일)한 지 14일째. 슈파로 씨가 아무리 재촉해 출국허가를 얻어낸다고 하더라도 내일(3월2일) 출발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3일과 4일은 주말이라 모든 업무가 중단되니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결국 월요일인 5일 출발이 가능하다. 이러면 충분한 훈련을 마치고 나서 출발 예정일로 잡았던 3일을 이미 넘기게 된다. 고국의 따듯한 응원이 어떤 때보다도 필요할 때다.
라브렌티야 (러시아)=전창기자 j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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