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자 중에는 석사 혹은 박사학위를 가진 고학력자도 많았다는 소식이 나왔다. 은행 창구직원은 비정규직이지만 정규직과 비슷한 수준으로 대우가 좋을 뿐 아니라 장차 정규직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대학의 행정직원 모집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나타난다. 경제위기 이후 10년 가까이 낮은 취업률과 불안정한 고용 때문에 적체된 인력이 조금이라도 안정적으로 보이면 그 직업으로 몰리고 있는 것이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을 뿐 아니라 은행 창구직원을 낮추볼 이유는 전혀 없다. 하지만 모든 직업은 그에 합당한 업무능력이 대체로 정해져 있다. 석사나 박사학위를 위한 공부가 은행에서 창구업무를 보는 데 도움이 되는 바는 거의 없다. 고학력을 갖고도 자신의 학위에 걸맞은 직업을 찾기 어렵거나, 찾았더라도 고용이 불안정하기 때문에 직무능력과는 상관없이 안정적으로 보이는 직업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 경우 교육과 훈련을 통해 만들어진 잠재적 능력과 실제로 하는 일 사이에는 큰 격차와 불일치가 발생한다. 이러한 불일치는 두 가지 측면에서 사회 문제를 야기한다.
첫째, 고학력자들을 키우는 데 들어간 많은 시간과 노력, 비용이 낭비된다. 무엇보다 본인의 노력과 시간이 낭비될 뿐 아니라 뒷받침한 가족에게도 큰 손실이 된다. 나아가 사회 전체적으로도 큰 손실과 낭비가 아닐 수 없다. 인적 자본에 대한 투자는 일할 능력을 키우는 데 들어간 비용보다 그 능력을 발휘해서 얻는 성과가 더 클 때 의미가 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우리의 인적 자본에 대한 투자는 손실만 키우는 것이다.
둘째, 자신의 능력에 맞지 않는 일에서 보람을 찾고 성심껏 일하기는 쉽지 않다. 이때 직업의 의미는 자신의 가능성을 발휘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생계유지를 위한 활동에 불과하다. 직업의 의미가 생계유지로 축소된 사회에서 일을 통해 행복과 보람을 느끼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할 뿐 아니라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생각이나 제안 역시 나오기 힘들다.
일본 도쿄대의 아리타 신 교수가 얼마 전 한국과 일본 청소년들의 희망 직업을 연구한 결과는 이 문제와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 청소년 대부분이 장래의 희망 직업으로 전문직과 자영업 두 가지만을 꼽은 반면, 일본 청소년들은 희망 직업이 다양할 뿐 아니라 부모의 직업을 따르겠다고 응답한 비율도 높았다. 한국 청소년들의 희망 직업은 모두 안정성을 추구하는 마음을 반영한다. 청소년들의 직업관마저 이처럼 천편일률적으로 안정을 지향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모습을 기대하기 힘들다. 또한 자신의 직업에 몰두해 일가를 이루겠다는 도전 정신도 생겨날 수 없다. 젊은이들이 안정적인 고수입이라는 하나의 목표만을 향해 달려간다면 우리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 인력의 낭비를 감수해야 할 뿐 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 또한 키울 수 없다.
우리의 이 같은 암울한 상황을 바꾸려면 사람들의 직업에 대한 가치나 의식이 바뀌어야 되겠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가치와 의식은 현실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미래 주역인 젊은이들의 꿈을 키워 줄 수 있는 사회가 되려면 무엇보다 사람들이 다양한 관심과 적성에 따라 다양한 직업을 택하더라도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춰야 한다. 일자리를 늘릴 뿐 아니라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정부와 기업, 시민사회가 손잡고 함께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의 미래가 달린 이 일은 성공할 수 없다.
한 준 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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