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마침내 나라의 명운을 건 도박에 성공하는 것 같다. 기세등등하던 미국 조지 W 부시 행정부도, ‘옆집’인 한국도 협박의 결과로 저들의 곳간을 채워 줄 것이다. 정의로운 일인가.
북녘 동포들이 처한 한계상황이 이미 의(義)와 이(利)를 논하기 힘들 만큼 절박하다는 사실은 찜찜한 가운데 오히려 위안이 된다.
“달라는 대로 주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래도 남는 장사다.” 이렇게 노무현 대통령은 말했다. “미국의 마셜플랜 이상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
마셜플랜 이상도 말고 그에 비교할 수 있을 정도의 성과만 거둔다면야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다. 전후 유럽이 이룬 경제발전은 미국의 원조 못지않게 자유시장경제의 결실이었다는 사실이다.
1948년 6월 24일. 이날은 서독 ‘라인 강의 기적’이 시작된 날로 평가된다. 마셜플랜에 따른 자금이 유입된 날이 아니었다. 미국 영국 군정의 경제협의회는 이날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의장에게 경제정책의 전권을 위임했다. 에르하르트가 처음 취한 조치는 가격 통제를 없애 버린 것이었다.
독일인들은 “비어 있던 상점 선반에 곧바로 빵, 버터, 채소가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시장이 회복되면서 급속히 기아가 사라졌다. 7월 미 군정청의 보고서는 심지어 ‘식당, 호텔, 기차역에서 (고객에 대한) 정중함이 되살아났다’고 보고했다.
김일성대 출신인 본보 주성하 기자는 이와 정반대로 흐른 북녘 땅의 풍경을 회고한다. “고기를 항구에 부려 놓아도 수송차가 오지 않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그래도 어부들은 계획량을 채워야 배급을 받기 때문에 바다에 나가 또 잡아 오죠. 그동안 항구에서 썩은 고기는 인근 밭에 비료로 던져집니다.” 나름대로 국가의 기강이 살아 있던 1980년대 북한의 일이다.
두 일화에는 앞으로 북한이 나아가야 할 길의 해답이 있다. 북한 주민들이 겪어 온 기아와 고난은 미국의 경제제재 때문인가, 사회주의권의 붕괴 때문인가. 그에 앞서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비효율성이 이 나라를 고난으로 몰아넣은 것이 아닌가.
북한 주민들이 오늘날 생활을 이어 나가고 있는 것은 배급체계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사회주의가 그토록 배격했던 ‘장마당’이 그나마 그들을 살려 왔다.
노 대통령의 적극적인 의지대로라면 북한에는 앞으로 ‘달라는 대로 주는’ 물자와 자금이 밀려들 것이다. 그러나 북한형 마셜플랜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경제활동의 전제부터 통째로 바뀌어야 한다. ‘기업소’는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 되어야 하고 각 분야에 경쟁과 거래의 원리가 도입돼야 한다. 그것이 ‘주체사상’이 강조해 온 인간의 ‘창발성’에도 순응하는 길 아닌가.
북한 지도부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만약 모른다면 깨우쳐 줘야 한다. 북-미 양자회담 합의는 분명 그들이 애써 얻어낸 기회지만, 수명이 길지 않은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
유윤종 국제부 차장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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