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정부 시절의 일화(逸話) 한 토막. 강영훈 총리가 취임 직후 국무회의를 주재하는데 뒷자리에 배석해 있던 모 대통령사정비서관이 “각하 말씀”이라며 대통령의 당부 사항을 전하려 했다. 수석비서관보다 세다는 말을 듣던 비서관이었다. 그러나 강 총리의 호통이 회의장을 울렸다. “거기 누구야? 누군데 장관들 회의에 끼어드는 건가!” 누군지 알고 하는 소리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비서실장의 발언도 금지했다. 기획예산처 장관을 마치고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자리를 옮긴 전윤철 전 감사원장은 ‘혈죽(血竹·핏대) 선생’이란 별명답게 국무회의 석상에서 몇 차례나 장관들의 발언을 비판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통령에게서 “비서실장은 국무회의에서 절대 발언하지 말라”는 함구령을 받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황호택, ‘생각의 리더 10인’ 2004년)
▷국무회의는 ‘정부의 권한에 속하는 중요한 정책을 심의’(헌법 88조)하는 자리다. 의장은 대통령이, 부의장은 국무총리가 맡고 정부조직법상 중앙행정부처 장관들이 위원이 된다. 또 헌법 82조는 ‘대통령의 국법상 행위는 문서로써 하며, 이 문서에는 국무총리와 관계 국무위원이 부서(副署)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국무회의는 그렇게 엄중한 자리다. 대통령비서실장은 국무위원이 아니다. 법적 책임이 없는, 말 그대로 ‘비서의 우두머리’로 국무회의에 배석할 뿐이다.
▷문재인 대통령비서실장이 그제 노무현 대통령이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사안이 생기면 (문제가 된 공무원을) 지방으로 좌천시키는데…지방사람 자존심 상하는 문제”라며 각 부처의 지방전출제도를 비판했다. 제이유 사건에 대통령사정비서관을 ‘엮어 넣기’ 위해 불법수사를 자행한 검찰 수사팀의 지방전출 조치를 겨냥한 발언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에 이어 대통령까지 “(담당 검사를) 괘씸죄로 다루지는 않겠다”고 한 끝에 나온 발언이어서 당장 ‘검찰 군기 잡기’의 신호탄이 아니냐는 반응이 나왔다. 문 실장이 대통령비서실장으로서 본분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김 창 혁 논설위원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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