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18일) 아침 나는 텔레비전 앞에 붙박여 있었다. 우승자가 궁금해서가 아니었다. 벅차고 뜨거운 장면이 연속으로 지나가 통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35km 지점인 잠실대교 위, 시각장애인이 노란 끈으로 손목을 묶고 달리는 중이었다. 땀과 심장 박동과 피부 위로 지나가는 바람결을 카메라는 놓치지 않고 잡아냈다. 그 곁에 노란 끈의 다른 쪽을 손목에 묶고 달리는 도우미의 얼굴. 터질 듯 충만한 그의 표정은 ‘42.195는 사랑입니다’라는 이번 서울국제마라톤의 구호를 생생하게 웅변했다.
등에 사람 이름이 빽빽이 적힌 종이를 붙이고 달려오는 건 SK㈜의 신헌철(62) 사장이었다. 신 사장이 풀코스를 완주할 경우 기념으로 이웃돕기 성금을 내겠다고 약속한 지인의 이름이란다. 명단을 등에 붙이고 달리는 건 누구의 발상일까. 친구의 명찰을 모자에 잔뜩 붙이고 카메라 앞에 나오던 고등학생 대상 퀴즈 프로그램에서 힌트를 얻었을까. 신통하고 흐뭇하다. 어른이 저렇게 아이같이 천진한 짓을 하는 걸 좀 자주 봤으면!
괜한 엄숙으로 무장하느라 그간 우리는 불필요한 피곤을 가중하면서 살았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잊었다. 햇살과 바람 아래 맨살을 드러내 놓고 제 호흡만을 들여다보며 달린다는 건 인생의 핵심을 대면하는 일이다. 숨이 가빠서라도 기만과 위선은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쓸데없는 껍데기를 내려놓을 때 세상이 잘 보인다. 같이 뛰는 사람의 숨소리가 비로소 또렷하게 들린다. 이웃과 함께 달린다는 건 달고 미쁘고 황홀한 일이다. 아무리 잘난 척해 봐도 우린 결국 이웃이 없으면 살 수 없다.
요 며칠 인터넷에서는 목도리녀가 화제였다. 허술한 노숙자의 목에 자신의 붉은 목도리를 벗어 걸어 주는 처녀의 모습. 화제가 된 건 목도리를 풀어 주는 이가 그만큼 드물어졌다는 증거일 거다. 전에는 당연하고 심상했을 그런 일이 이젠 하도 희귀해서 눈부신 일이 돼 버렸다. 나 또한 노숙자의 종이박스 곁을 총총히 지나쳐 왔다. 지나치면서 내 마음이 아무렇지도 않았나? 결코 그렇지는 않았다. 그 곁에 앉아 장갑이나 목도리를 벗지 못하게 날 막은 건 뭐란 말인가.
이번 마라톤 참가자 중엔 자기가 달린 거리만큼 1m에 10원씩 42만1950원을 내놓겠다고 약속한 카이스트의 문송천 교수 같은 이가 여럿 있었다. 그가 저만치 달려올 때 나는 어쩔 수 없이 우리 어머니 세대가 벌이던 절미운동을 떠올려야 했다. 밥솥 곁에 자그만 항아리를 두고 밥할 때마다 쌀 한 줌씩을 덜어 놓아 그게 모이면 굶는 이웃에게 전해 주던 사람. 밥 한 그릇이 귀하던 시절에는 절미운동 같은 건 미덕도 뭐도 아니었다. 그저 하늘이 내려다본다 싶어 자연스럽게 이웃을 위해 제 식구 밥을 한 숟갈씩 덜어 냈을 뿐.
지금 우리 집엔 남는 옷과 목도리가 넘쳐 난다. 난 어째서 밥 굶던 시절의 엄마보다 더 인색해졌을까. 버들은 아련히 노란 움을 틔우고 햇살 아래 달리는 사람의 고동은 북소리처럼 울려 대는데 나는 부끄러움을 감추느라 이봉주 선수를 향해 더욱 꽥꽥 소리를 질러 댔다.
김서령 생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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