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서령]‘사랑의 레이스’ 서울국제마라톤

  • 입력 2007년 3월 20일 03시 01분


이봉주가 이겼다. 야생 동물같이 껑충거리는 케냐 선수를 왠지 안타깝고 허술한 자세와 표정의 이봉주가 끝내 따라잡고 말았다. 통쾌하다! 장하다! 그는 서른일곱이 인생 최고의 전성기임을 증명했다. 슬쩍 기운이 빠지려고 하는 대한민국의 서른 후반들에게 이봉주는 그들이 아직 청춘의 한가운데 있음을 자각하게 했다. 이봉주의 공로는 마라톤 우승이 아니라 청춘을 10년 이상 연장해 동년배를 약동하게 만들어 준 바로 그 점에 있을는지 모른다.

일요일(18일) 아침 나는 텔레비전 앞에 붙박여 있었다. 우승자가 궁금해서가 아니었다. 벅차고 뜨거운 장면이 연속으로 지나가 통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35km 지점인 잠실대교 위, 시각장애인이 노란 끈으로 손목을 묶고 달리는 중이었다. 땀과 심장 박동과 피부 위로 지나가는 바람결을 카메라는 놓치지 않고 잡아냈다. 그 곁에 노란 끈의 다른 쪽을 손목에 묶고 달리는 도우미의 얼굴. 터질 듯 충만한 그의 표정은 ‘42.195는 사랑입니다’라는 이번 서울국제마라톤의 구호를 생생하게 웅변했다.

등에 사람 이름이 빽빽이 적힌 종이를 붙이고 달려오는 건 SK㈜의 신헌철(62) 사장이었다. 신 사장이 풀코스를 완주할 경우 기념으로 이웃돕기 성금을 내겠다고 약속한 지인의 이름이란다. 명단을 등에 붙이고 달리는 건 누구의 발상일까. 친구의 명찰을 모자에 잔뜩 붙이고 카메라 앞에 나오던 고등학생 대상 퀴즈 프로그램에서 힌트를 얻었을까. 신통하고 흐뭇하다. 어른이 저렇게 아이같이 천진한 짓을 하는 걸 좀 자주 봤으면!

괜한 엄숙으로 무장하느라 그간 우리는 불필요한 피곤을 가중하면서 살았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잊었다. 햇살과 바람 아래 맨살을 드러내 놓고 제 호흡만을 들여다보며 달린다는 건 인생의 핵심을 대면하는 일이다. 숨이 가빠서라도 기만과 위선은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쓸데없는 껍데기를 내려놓을 때 세상이 잘 보인다. 같이 뛰는 사람의 숨소리가 비로소 또렷하게 들린다. 이웃과 함께 달린다는 건 달고 미쁘고 황홀한 일이다. 아무리 잘난 척해 봐도 우린 결국 이웃이 없으면 살 수 없다.

요 며칠 인터넷에서는 목도리녀가 화제였다. 허술한 노숙자의 목에 자신의 붉은 목도리를 벗어 걸어 주는 처녀의 모습. 화제가 된 건 목도리를 풀어 주는 이가 그만큼 드물어졌다는 증거일 거다. 전에는 당연하고 심상했을 그런 일이 이젠 하도 희귀해서 눈부신 일이 돼 버렸다. 나 또한 노숙자의 종이박스 곁을 총총히 지나쳐 왔다. 지나치면서 내 마음이 아무렇지도 않았나? 결코 그렇지는 않았다. 그 곁에 앉아 장갑이나 목도리를 벗지 못하게 날 막은 건 뭐란 말인가.

이번 마라톤 참가자 중엔 자기가 달린 거리만큼 1m에 10원씩 42만1950원을 내놓겠다고 약속한 카이스트의 문송천 교수 같은 이가 여럿 있었다. 그가 저만치 달려올 때 나는 어쩔 수 없이 우리 어머니 세대가 벌이던 절미운동을 떠올려야 했다. 밥솥 곁에 자그만 항아리를 두고 밥할 때마다 쌀 한 줌씩을 덜어 놓아 그게 모이면 굶는 이웃에게 전해 주던 사람. 밥 한 그릇이 귀하던 시절에는 절미운동 같은 건 미덕도 뭐도 아니었다. 그저 하늘이 내려다본다 싶어 자연스럽게 이웃을 위해 제 식구 밥을 한 숟갈씩 덜어 냈을 뿐.

지금 우리 집엔 남는 옷과 목도리가 넘쳐 난다. 난 어째서 밥 굶던 시절의 엄마보다 더 인색해졌을까. 버들은 아련히 노란 움을 틔우고 햇살 아래 달리는 사람의 고동은 북소리처럼 울려 대는데 나는 부끄러움을 감추느라 이봉주 선수를 향해 더욱 꽥꽥 소리를 질러 댔다.

김서령 생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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