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오후 기자 앞으로 한 통의 e메일이 도착했다. 제목은 ‘한미 FTA 반대 집회의 평화적 개최에 대한 국가인권위의 입장.’
이 편지에서 인권위는 “별다른 불상사 없이 끝난 25일 집회는 집회의 자유라는 기본권과 평화적인 시위 문화가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고 밝혔다.
글을 읽고 난 뒤 ‘집회 현장에 인권위 관계자는 아무도 없었던 걸까’라는 생각이 맨 먼저 떠올랐다.
25일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범국본)는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FTA 협상 중단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경찰이 범국본의 폭력시위 전력 등을 이유로 금지 통고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경찰 말을 따를 수 없다”며 강행한 행사였다.
서울광장 집회가 끝나자마자 7000여 명의 참석자는 경찰이 손 쓸 새도 없이 차가 달리는 도로 위로 쏟아져 나왔다.
정면에서 차가 달려오고 뒤에도 수십 대의 차가 줄을 잇고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이었지만 이들은 개의치 않았다. 소주를 병째 들고 마시며 걷는 모습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술에 취한 한 집회 참가자는 종각역 사거리 한복판에서 전경차에 기대어 소변을 보기도 했다.
을지로에서 종각, 종로3가로 이어지는 양방향 대로는 순식간에 완전히 마비됐다.
이날 도심으로 봄나들이를 나왔다가 1시간 가까이 꼼짝없이 버스와 승용차 안에 갇혀 있어야 했던 많은 시민의 얼굴엔 짜증이 가득했다.
운전자와 집회 참가자들이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놀람과 근심이 뒤섞인 얼굴로 쳐다보던 한 외국인 관광객은 캠코더를 들어 그 모습을 촬영하기도 했다.
도심 이곳저곳을 유유히 행진하던 시위대는 미국대사관 앞에 다시 모여 양방향 16개 차로를 완전히 점거한 채 2시간가량 집회를 더 하고 나서야 행사를 마쳤다. 집회 마지막에는 ‘성공적인’ 집회를 자축하며 하늘로 폭죽을 쏘아 올렸다.
이날 집회에서 ‘유혈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지난번 폭력진압 논란으로 곤욕을 치른 경찰이 시위대의 가는 길을 조용히 비켜 줬기 때문이다.
전경들은 흥분한 일부 시위대의 욕설과 주먹질에도 ‘마네킹’처럼 꼼짝없이 서 있어야 하는 분위기였다.
이날 집회는 법도, 규칙도, 타인에 대한 배려도 없는 ‘자유’가 아닌 ‘방임’의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인권위는 집회의 자유와 평화적인 시위 문화가 공존하는 희망을 발견했다니, ‘자기 절제’와 ‘상호 존중’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지 되묻고 싶다.
임우선 사회부 ims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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