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차지원과 다양한 혼용평가가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망가뜨린 결정적 요소이다. 수리영역에서 ‘가’형과 ‘나’형 중 하나, 탐구영역에서 사회탐구 과학탐구 직업탐구 중 하나를 평가한다는 혼용평가의 도입은 수학과 과학을 덜 하거나 아예 하지 않고도 이공계에 입학할 수 있도록 만든다.
예를 들어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이공계 지원학생이 수리 ‘가’형보다 학습 범위가 좁은 수리 ‘나’형을 선택해도 전형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 학생은 혼용평가 속에서 안심하고 자기 계열을 넘어 유리한 영역과 과목을 찾아 나설 수 있다. 실제로 2007학년도 수능에서 수리 ‘가’형을 선택한 학생은 1년 전의 26.4%에서 23.4%로 떨어졌다.
이것저것 웬만하면 똑같이 평가해 준다는 혼용평가는 대학 설립 준칙주의에 의한 대학의 증가, 대학의 학생 유치를 위한 편법, 교육과정 운영상의 잘못에 대한 교육자의 무관심, 학생 및 학부모의 개인주의, 정치가와 사회의 포퓰리즘이 이루어낸 합작품이다. 혼용평가의 가장 큰 폐해는 현재 고교 2학년 이후의 이공계 심화교육을 무력화시킨다는 점이다.
다양한 관점이 있겠지만 국가가 이끄는 교육은 거시적 안목으로 살펴봐야 한다. 교양을 가르치는 일은 기본이고 세계와 경쟁할 수 있는 과학기술, 창의성 등 국가경쟁력 제고를 위해 교육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이공계 교육이 특히 중요한데 안타깝게도 이공계 교육이 난파 직전이다. 국가경쟁력에 관계되는 대학 전공교육으로의 연결고리가 부실하거나 끊어지면 고 1까지의 값진 투자와 훌륭한 성과는 물거품이 되고 만다. 중반까지 선두권을 지키다가 작전의 차질로 종반에 기권하는 마라토너와 같은 신세다. 매우 아깝고 통탄해야 할 일이다.
과학기술과 창의성은 주로 수학과 과학을 통해서 배울 수 있다. 수리학문의 붕괴를 가져오는 혼용평가는 반드시 금지해야 한다. 그런데 이공계에서 원칙적으로 평가했던 소수의 대학마저 자연계 인적자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혼용평가를 적용하려고 한다. 대학의 자체 개선은 기대하기 어렵다. 자연계열은 수리 ‘가’형과 과학으로 전형해야 한다는 원칙을 경과규정을 두고서라도 천명해야 한다. 원칙이 지켜진다는 믿음만 형성되면 줄어든 고교 이과생은 곧 늘어날 수 있다.
이와 함께 공학교육의 인재 양성, 질적 발전, 품질 보증을 목적으로 설립된 공학교육인증기관에 부탁하고 싶다. 공학교육인증제를 취득하려면 대학이 신입생을 선발할 때 반드시 수리 ‘가’형과 과학으로 전형할 것을 전제로 해 달라는 말이다. 아무렇게나 뽑고서 공대 신입생에게 보충교육을 하는 시늉으로 능력을 인정해 준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10년간의 교차지원과 혼용평가로 교육 환경이 구조적으로 악화됐다. 교육과정의 정상화를 위해 최소한의 관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한데도 교육인적자원부는 그동안 몇 차례 권고하는 데 그쳤다.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고 거시적인 안목으로 접근해야만 몇 년 후에 겨우 풀릴 수 있는 사안이기에 더더욱 절실하고 심각하다.
문권배 상명대 교수 수학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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