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상돈]정치인의 책 쓰기

  • 입력 2007년 3월 28일 03시 01분


정치인은 그들이 걸어온 길을 책으로 펴내곤 한다. 대통령과 총리 등을 지낸 정치인의 회고록은 그 자체가 소중한 역사 자료이기도 하다. 정치인은 자신의 과거를 미화할 목적으로 책을 내기도 하는데, 내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다는 힐러리 클린턴의 경우가 그러하다.

힐러리는 2003년에 나온 자서전의 선인세로 무려 800만 달러를 받았다. 액수도 액수지만 상원의원 임기 시작 전에 돈을 받아 의회의 윤리규정을 회피했다는 논란을 일으켰다. 대필 작가가 통째로 집필한 힐러리의 자서전은 교묘한 사실 왜곡이라는 비판을 들었다.

미국 대통령 중 글을 많이 쓰고 또 잘 쓴 사람으론 로널드 레이건을 들 수 있다. 대통령 퇴임 후 몇 년이 지나 불치의 알츠하이머병에 걸렸음을 알게 된 그가 미국민에게 보낸 고별의 편지는 언제 읽어도 눈시울이 뜨거울 정도로 감동적이다. 레이건을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은 백악관 집무실에서도 그가 책상에 앉으면 무엇인가를 썼다고 말한다.

‘준비된 대통령’ 레이건의 글쓰기

두 번에 걸친 캘리포니아 주지사 임기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야인으로 돌아간 1975년 초부터 레이건은 1주일에 다섯 번씩 5분짜리 라디오 논평을 했고, 격주로 신문에 칼럼을 썼다. 외교 국방 경제 세금 교육 등 국정의 모든 방면에 걸쳐 레이건은 미국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그가 다룬 주제는 B-1 폭격기 개발에서 철도사업의 경쟁력, 교원노조의 폐단에 이르는 광범한 것이었다.

레이건의 프로는 300개 방송국의 전파를 탔고, 그의 칼럼은 200개 이상의 신문에 연재됐다. 레이건이 다룬 방송 주제 중에는 한국에 관한 내용이 몇 개 있다. 레이건은 지미 카터 대통령이 자신의 주한 미군 철수정책에 반대하던 주한 미군 참모장 싱글러브 소장을 해임한 조치가 부당하며, 한국 정부의 불법 로비(박동선 사건) 못지않게 미국 내에서 소련의 은밀한 로비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레이건의 방송과 칼럼은 1975년 늦가을에 그가 공화당 대통령 후보를 뽑기 위한 예비선거에 나서면서 중단됐다. 이듬해 여름 공화당 후보 지명대회에서 포드 대통령에게 패배하자 레이건은 방송과 칼럼 집필을 다시 시작해서 1979년 10월에 대통령 출마를 선언할 때까지 계속했다.

레이건은 육필로 그 많은 방송 원고를 손수 작성했는데, 상자에 든 원고 뭉치는 레이건의 기념 도서관을 준비하는 도중에 우연히 발견됐다. 방송 원고를 읽어 본 학자들은 방송 내용의 많은 부분이 나중에 국가정책이 됐음을 알게 됐다. 이 방송 원고는 2001년에 책으로 발간돼서 레이건이 누구보다도 잘 준비된 대통령이었음을 다시 한번 알게 해 주었다. 알츠하이머병 말기이던 레이건은 책의 출간을 알 수가 없었다.

이제 우리 주변을 둘러보기로 하자. 언제부터인지 우리나라의 정치인과 정치지망생 사이에선 책을 내고 출판기념회를 여는 일이 유행이 됐다. 정치인이 대필 작가의 도움을 받아 책을 내는 것을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신문 잡지에 글 한편 써 보지 못한 사람이 별안간 책을 내는 모습은 정상이 아니다.

정치적 목적을 갖고 펴낸 이런 책은 자기 과시가 있기 마련이다. 또 미래, 선진화, 따듯한 사회, 민족, 통합 등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많다. 그러면서 자기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식이니, 오늘날 한국에는 출사표를 낸 제갈량이 널려 있는 셈이다. 어떤 책을 보면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가 저자의 등장을 위한 준비과정인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라서 웃지 않을 수 없다.

눈도장 찍는 출판기념회 씁쓸

책도 책이지만 출판기념회라는 명칭을 내걸고 벌이는 거창한 행사도 정상이 아니다. 원래 출판기념회란 힘들여 책을 펴낸 저자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저자의 주변 사람이 열어 주는 조촐한 자리다. 정치인의 출판기념회는 눈도장 찍고 줄서기하고, 세력 과시를 위해 사람을 동원하는 난장판이 돼 버렸다. 책 쓰기마저 정치적 도구로 전락해 버린 우리 세태가 한심하다.

이상돈 중앙대 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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