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잔혹한 정복자들에게 희생된 아메리카 원주민도 많았지만 구대륙 세균에 희생된 수에 비하면 미미하다. 1520년대 약 2000만 명이던 멕시코 인구는 천연두가 아스텍족(族)에게 전염되자 90여 년 만에 160만 명으로 격감했다. 19세기 백인들은 북미 인디언들을 몰살하기 위해 천연두 환자가 덮고 자던 담요를 선물하기도 했다. 역시 효과 만점이었다. 제러드 다이아몬드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저서 ‘총, 균, 쇠’에서 “이처럼 균의 변천과 교환으로 인류사가 자주 바뀌었다”고 썼다.
▷광릉 국립수목원에서 1km 떨어진 숲에서 잣나무 두 그루가 재선충에 감염된 사실이 확인됐다. 잣나무에 붙은 재선충은 세계적으로 처음 발견됐다. 재선충은 원래 소나무의 병으로 감염되면 치사율이 100%여서 ‘소나무 에이즈’라 불린다. 1988년 일본에서 부산항으로 들어온 재선충은 이미 영남지방의 소나무 숲을 휩쓸었다. 지금은 백두대간을 타고 강릉까지 북상해 ‘남산 위의 저 소나무’도 위협받고 있다. 일본, 대만에서는 소나무가 거의 전멸 상태다.
▷광릉은 세조의 능이다. 그곳의 수목원은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수도권에 있는 산림자원의 보고다. 산림청은 발생지역을 중심으로 1만5000평의 잣나무 2000여 그루를 베어 냈다. 광릉 숲뿐 아니라 국내 최대의 잣 생산지인 경기 가평군 일대의 잣나무 숲을 지키기 위한 고육책이다. 1mm짜리 재선충도 살려고 발버둥치겠지만 우리도 잣나무 숲을 그들에게 선선히 내줄 수는 없다.
허승호 논설위원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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