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남관 화백(1911∼1990).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활동했던 그는 동양의 수묵화와 서양의 추상화를 결합한 독특한 예술세계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옛 문명의 흔적으로 남은 기호에서 인간의 생명력을 읽어냈다. 이는 작가의 현실체험에서 비롯됐다. 그는 6·25전쟁 때 종군화가로 참여하여 겪은 전쟁의 참상을 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나는 두 차례의 전쟁(태평양전쟁, 6·25전쟁)을 겪었다. 숱한 시체, 숱한 부상자의 얼굴을 보았다. 코, 입, 눈들이 제자리에 붙어 있지 않고 비뚤어져 있는 것 같았고, 온 얼굴에 받은 상처의 자국, 그것이 꼭 고성의 돌담조각 같기도 했고 석기시대의 깨어진 유물 조각들이 긴 세월을 땅 속에서 신음하다가 태양광선에 노출되면서 그 더덕더덕한 모습을 드러낸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의 작품은 일그러진 형상을 표현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비극적이거나 기괴함과는 거리가 멀다. 화면을 이루고 있는 색채가 아름답고 환상적이기 때문에 마치 꿈이나 우주적 공간을 재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내게는 완전한 형태나 피부를 가진 것보다 그 내포된 생명(극히 통속적으로 아름다운 것보다는 잔혹한 고비를 넘어온 인간상)이 나를 한층 더 유혹했다. 잔혹한 경지를 겪으면서도 신에 의거하지 않고 자기 외의 모든 것을 부정하면서 악착같이 생을 이어나가려는 인간상에 관심이 더 갔다.”
이처럼 생명의 본질을 탐구하는 예술세계를 추구했던 남 화백은 프랑스 화단으로부터 동서양의 문화를 서로 조화롭게 결합한, 보기 드문 예술가로 평가받았다. 그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계기는 1966년 프랑스 망통에서 열린 회화 비엔날레였다. 피카소가 특별 출품한 이 비엔날레에서 그는 아르망, 뷔페, 타피에스 등 쟁쟁한 거장과 함께 참가해 당당히 1등상을 차지했다. 그러나 1986년 국제사기극에 휘말려 작품 20점이 증발되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는 1990년 3월 30일 일본 도쿄아트엑스포에 출품하기로 약속한 작품제작에 열중하다 엑스포 개막일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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