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59년 달라이 라마 인도 망명

  • 입력 2007년 3월 31일 03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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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3월 31일 티베트의 정치 종교 지도자인 제14대 달라이 라마가 인도에 망명했다. 수도 라싸를 떠난 지 보름 만이었다. 히말라야를 넘는 2600km의 대장정을 감내해야 할 만큼 상황은 최악이었다.

티베트는 중국의 영향력에 놓여 있다가 20세기 들어서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1949년 중국은 ‘중국 본토를 하나의 정부가 통치한다’는 공산당의 구호 아래 티베트 등 옛 중국 영토를 찾겠다고 발표한다. 이듬해 4만 명의 중국군이 국경을 넘어 티베트의 남루한 군대를 순식간에 꺾었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의회의 요청으로 지도자의 역할을 맡아야 했다.

그때 달라이 라마는 겨우 16세였지만, 일찌감치 지도자로서의 교육을 받아 큰 혼란은 없었다. 제14대 달라이 라마로 지목받은 것이 두 살 때. 티베트에서는 달라이 라마가 입적하면 다시 환생한다고 믿는다. 제13대 달라이 라마가 죽은 뒤 사절단은 예시를 따라 암도 지역에서 다음 대의 달라이 라마가 될 아이를 찾았다. 테스트를 거친 뒤 환생한 달라이 라마로 받아들여졌지만 이후 그의 삶은 잠시도 편안하지 않았다. 티베트와 중국의 갈등 때문이었다.

중국군의 티베트 침공 후 9년 동안 달라이 라마는 중국과 협상을 벌였다. 그렇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중국 정부는 공산화를 강행하려 했고 티베트에서는 잇달아 저항운동이 벌어졌다. 1959년 3월 중국은 급기야 라싸의 노르불링카 궁을 폭격한다. 때마침 라싸에는 중국 정부가 달라이 라마를 체포하려는 움직임을 감지한 군중이 엄청나게 모여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중국의 폭격으로 1만5000여 명의 티베트인이 사망했다.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피신해야 했다.

시위는 1962년에 끝났다. 그동안 수만 명이 살해됐고 10만 명이 티베트를 떠나 망명했다. 티베트는 1965년 자치구로 승격되면서 자치권을 부여받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듬해 문화혁명이 시작되면서 6000여 곳의 티베트 사원이 파괴됐다. 달라이 라마의 망명 이후 5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 중국과 티베트의 관계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이 라마가 도착했던 인도 다람살라에는 망명정부가 세워졌다. 티베트 정치 행정의 중심지이자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머무는 이곳은 세계 곳곳에 흩어진 600여 만 티베트인의 정신적 귀의처이며 세계 티베트 불교 신도들의 성지로 자리 잡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독립투쟁에 공헌한 공로로 1989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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