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참여의 양적 증대가 곧바로 민주화의 완성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참여민주주의’ 단계에 들어서 더욱 소중해지는 것은 바로 참여의 질적 수준이다. 민주화의 완성을 위해서는 단순한 시민사회가 아닌 수준 높은 시민사회가 필요한 법이다.
대한민국의 현 단계 민주주의가 봉착한 현실도 같은 맥락에서 짚어 봐야 한다. 지난 4년간 참여의 양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만큼이나 참여의 질에 대한 회의적 평가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총체적 민란(民亂)’이나 ‘갈등 공화국’과 같은 긴박한 현실 인식이 이토록 큰 사회적 공감을 불러일으킬 리 없다. 그 어느 쪽이건 이는 민주화 이후의 우리 시민사회가 깊은 혼돈과 위기에 빠진 현실을 간접으로 입증한다고 할 수 있다.
작금의 현실에 대한 일차적 책임이 뺄셈의 정치를 구사해 온 일부 국가지도자에게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들의 계산된 편 가르기에 일희하고 일비하다 결국에는 저들이 원하는 대로 편 가르기를 해 준 우리 시민들도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더군다나 지난 4년을 돌아보면 우리 시민사회도 정치권보다 크게 나아 보이지 않는다. 참여의 명분에 기대어 이전투구와 자기주장을 일삼는 데는 우리 모두가 욕하는 정치권의 행태보다 그리 못할 것도 없다.
정치 기웃거리다 혼돈의 늪으로
욕하면서 닮는다고 하던가. 산업화의 결과 ‘천민자본주의’를 우려하듯, 이대로 가면 민주화도 ‘천민민주주의’로 귀결될까 걱정된다. 현 단계 한국 시민사회의 자성이 ‘시민 동원의 양적 팽창’이 아닌 ‘시민 참여의 질적 제고’에서 출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가오는 우리 민주화 3기의 화두는 ‘민주제도의 심화 발전’보다는 ‘민주의식의 상향 발전’인 것이다.
이 새로운 과제를 위해 우리 시민사회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 그 ‘무엇’의 내용은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식 개혁을 위한 ‘시민단체의 하방(下放)’이다. 예를 들면 국민 1인당 전력소비량이 독일이나 일본보다도 높은 우리의 환경의식을 솔직히 반성하며 환경단체가 먼저 풀뿌리 의식 개혁에 나서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시민단체들이 정치의 광장을 떠나 생활의 골목으로 들어가 시민 속으로 스며드는 수밖에 없다.
그 ‘어떻게’의 첫 단추는 시민단체의 ‘탈(脫)운동화’다. 중앙의 명망가와 거대 조직, 그리고 대규모 군중 동원과 전국 연대를 통한 민주화의 시대는 지났음을 시민단체 스스로가 깨달아야 한다. 운동가 중심에서 시민 중심으로, 중앙을 떠나 지방으로, 전국적 의제에 앞서 일상적 의제로 전환함이 시대적 요구임을 직시해야 한다. 요컨대 지금은 다시 진지(陣地)로 돌아갈 시점인 것이다.
‘어떻게’에 대한 두 번째 대답은 시민단체의 ‘탈정치화’다. 정치적 편 가르기를 강요받는 상황에서는 내부 구성원 간의 유대감이 유지될 수 없고 유대감 없이는 풀뿌리 공동체도, 진정한 의식 개혁도 없다. 그래서 대선과 같은 첨예한 정치 현안 앞에서도 시민단체는 정치적 중립을 고수해야 한다. 하물며 전선(戰線)으로 나가기를 앞장서 독려하는 시민단체란 있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대선정국을 맞아 다시 고개 드는 일부 시민단체의 정파적 편향성을 우려의 눈으로 주시한다. 그들이 내건 ‘진보정권 10년 종식’이나 ‘반(反)수구연대’와 같은 정치 구상 정도로는 우리 시민사회의 미래가 불안하기만 하다. 대선의 쓰나미가 물러간 뒤 과연 그들이 돌아갈 진지나마 남아 있을지도 의문이다.
생활속 시민운동 뿌리 찾아야
같은 이유에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흥사단,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녹색미래의 4개 시민단체가 주도하는 시민사회 내부의 자정(自淨) 움직임에 주목한다. 그들이 표방하는 ‘국민적 신뢰 회복을 위한 정파적 편향성 극복’은 ‘시민 없는 시민사회’가 시민들을 향해 내딛는 상큼한 첫발이 될 수도 있을 터이다. 그만큼 이달에 선포 예고된 그들의 NGO ‘사회적 책임헌장’에 거는 기대가 남다르다. 그리고 그 깃발을 뒤따라 진지로 돌아갈 대오의 질서정연한 행진이 시작되기를 기다린다.
김성호 객원논설위원·연세대 교수 sunghokim@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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