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다녀온 열 살짜리 아들이 전화를 해 왔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어떤 형에게 맞았다는 거였다. 놀이에 끼워 달라고 아들이 보챈 것이 시비의 발단이었다. “나보다 훨씬 커서 그냥 여기저기 맞기만 했다”고 상황을 설명하다가 끝내 울음보가 터졌다. 아프기보다는 분했던 모양이다.
일단 심각한 일이 아니라는 판단을 한 후 ‘일방적으로’ 아이의 역성을 들기 시작했다. ‘저보다 작은 아이를 때리는 녀석은 형이라고 부르지도 마라’부터 ‘또 그러면 너도 때려줘라’를 거쳐 ‘그 애 엄마한테 엄마가 지금 당장 전화할까?’에 이르자 아이는 마침내 수그러들어 “그 형 엄마한테 말하는 건 조금 생각해 보고요”라며 전화를 끊었다.
그날 오후 내가 다뤄야 했던 기사 중 하나는 사소한 시비 끝에 교실에서 친구와 주먹다짐을 벌였던 중학생 한 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이었다. 폭력서클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아이들이라는 게 학교 측 설명이었다.
개인사와 사회사가 두서없이 뒤섞이던 그 오후, 머릿속에 든 생각은 ‘싸움이 벌어지는 동안 주위 아이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였다. 학교폭력의 70% 이상이 교내에서 발생한다는 것이 연구결과이고 보면 교내 폭력 사건의 상당 부분은 친구들이 목격자인 사건이다. 그러나 현장지도 경험을 가진 아동 청소년 폭력 문제 전문가들은 “상황에 개입하려는 아이들은 거의 없다”고 말한다. 싸움에 휘말릴까 두려워서보다는 ‘이건 폭력이다’라는 인식이 희박해서란다.
2005년 12월 한국청소년상담원이 발간한 학교폭력 예방 지침서 ‘학교폭력 SOS’는 ‘뺨을 때리거나 침을 뱉거나 손이나 옷을 잡아당기거나 미는 것’ 같은, ‘친구들끼리 놀다가 그럴 수도 있는 일’들이 형법상의 단순폭행죄에 해당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일견 살벌해 보이지만 ‘학교폭력은 범죄’라는 인식부터 하지 않으면 폭력을 막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한국청소년상담원 오혜영 박사는 “특히 학교폭력의 경우 사건이 발생한 후 반 전체 학생들을 교육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목격한 학생들도 광의의 폭력 피해자입니다. 사후교육을 통해 친구끼리의 싸움도 심각한 폭력이라는 것을 알릴 수 있고, 무엇보다도 ‘쟤, 맞았대’라고 수군대며 피해 학생을 다시 한번 상처 주는 일을 막을 수 있어요.”
그러나 사후교육까지 해 가며 ‘불미스러운’ 사건이 교문 밖으로 새 나가는 걸 기꺼이 감수하는 학교는 많지 않다. 2004년 제정된 학교폭력특별법은 학교폭력 예방교육을 정기적으로 실시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의무 이수시간을 정하지 않아 교육시간은 학교장 재량에 따라 오락가락한다.
폭력을 예방하는 교육은 과연 국어 영어 수학보다 아이들 삶에 덜 중요한 것일까.
시민단체인 ‘학교평화만들기’의 이화영 대표는 ‘또래 중재’가 학교폭력 해결에 가장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머리가 아니라 감수성으로 폭력은 나쁘다는 걸 알게 해야 합니다. 스스로 존중받아 본 아이들은 내가 소중한 만큼 친구도 소중하다는 것을 잘 알죠.”
그날 밤 어느새 낮의 일은 잊어버리고 신나게 놀고 있는 아이에게 “널 때린 형도 동생인 네가 대든 게 분해서 울었을지 몰라”라고 흘리듯 말했다. “너도 때려 줘라” 했던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아이도 어른도 평화를 배우기는 쉽지 않다.
정은령 사회부 차장 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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