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서병훈]남의 말도 좀 들읍시다

  • 입력 2007년 4월 16일 03시 03분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말이 많아지는 것 같다. 이런 사람들은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어떤 고위직 인사가 모처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좀 듣겠다”며 사람을 불러놓고선 자기 말만 하고 끝내는 모습을 본 적도 있다. 높은 양반만이 아니다. 대체로 우리 국민은 남의 말에 귀를 잘 기울이지 않는 편이다. 한국 민주주의가 부실한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토론 프로그램이 무척 많아졌다. 현안이 생길 때마다 활발하게 논쟁이 벌어진다. ‘강요된 침묵’은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유물로 정리된 지 오래다. 살맛나는 세상이 된 셈이다. 그러나 언로가 활짝 열리고 말이 많아진 대신 사회의 균열구조가 깊어졌다. 토론을 통해 차이가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적대감이 더 깊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중요한 사안마다 어김없이 사회가 둘로 갈린다. 접점을 찾지 못하고 팽팽하게 맞서 있어 나라 전체가 수렁에 빠진 듯하다. 끝내는 자유가 부담스럽고 민주주의가 원망스러워진다.

민주화 이후 둘로 갈라진 사회

이를테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둘러싸고 한국 사회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현격한 인식의 차이를 보여 준다. 한쪽에서는 “협정 체결은 나라를 팔아먹는 반역자들이 하는 짓”이라고 격분한다. 다른 쪽에서는 “대한민국의 경쟁력을 한 단계 끌어올려 선진국 대열에 합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후한 평가를 아끼지 않는다. 3불 정책(본고사, 고교등급제, 기여입학제 금지)을 놓고도 격렬한 설전이 계속된다.

어쩌면 이렇게 생각이 서로 다를 수 있을까. 의견 대립은 민주사회의 징표로 반겨야 할 일이다. 그러나 정도 나름이다. 지금처럼 ‘한 지붕 두 가족’이어서는 나라가 제대로 서기 어렵다. 어느 쪽이든 튼실한 다수파가 형성되지 않는 한 국가 차원에서 중대정책을 추진할 수가 없다. 중요한 사안일수록 국민의 합의가 절실하다. 그래야 정책의 정당성을 확보하면서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다.

첨예하게 대립하는 주장을 크게 보면 진보와 보수라고 하는 한국 사회의 대립축에 바탕을 두고 있다. 쉽게 합의점에 도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내용을 들여다보면 지금처럼 나라가 갈라질 만큼 원천적으로 인식 차가 나는 것도 아니다. 사소한 오해나 무지, 또는 근거 없는 편견으로 의견이 갈리는 경우가 태반이다. 하기에 따라 접점이나 합의 도출이 가능하다.

관건은 남의 말을 듣는 데 있다. 남이 하는 말만 잘 들어도 문제의 절반은 해소된다. 우선 다른 사람도 나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권리를 가진 존재임을 인정해야 한다. 민주시민이 갖춰야 할 제1덕목이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고 또 각자 나름대로 이해관계를 갖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아무리 듣기 싫은 말이라 하더라도 한번쯤은 경청해 보아야 한다.

민주주의를 움직이는 또 다른 원리는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다. 자신의 생각이 전적으로 옳다고 믿는 자세는 십중팔구 착각이요, 독선이다. 이것만큼 민주주의에 더 해로운 것이 없다. 자신의 한계를 겸허하게 인정한다면 남의 말을 안 들을 수가 없다. 오히려 남의 비판에 비춰 자기 생각을 견고하게 만들 수 있음을 고마워해야 한다. ‘자유론’을 쓴 영국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이 말했듯이, 상대편이 존재하기 때문에 양쪽 모두 건강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다.

내 생각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해야

이번 FTA 협상 과정에서 보듯이 이해관계가 엇갈리기 때문에 자기 주장을 버리지 못할 때가 있다. 그래서 ‘훈수꾼’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해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한마디 하면 대단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불행하게도 한국 사회에는 존경받는 어른이 드물다. 언론이 공백을 메워줘야 하는 데, 오히려 편견을 확대재생산 하는 데 앞장서는 경우가 없지 않다. 언론부터 남의 말을 듣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래야 한국 민주주의를 옥죄는 무의미한 대립이 해결의 길을 찾을 수 있다.

서병훈 숭실대 교수·정치외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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