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한국의 지속 가능한 발전과 선진국으로의 진입에 개헌이 필요하면 개헌을 해야 한다. 권력과 돈이라는 자원의 배분에 심한 불균등을 불러온 한국판 지역주의를 근원부터 청산하고, 승자 독식의 정치 구도와 대통령 1인에 의해 나라와 국민의 운명이 좌지우지되는 위험정치를 혁파하기 위해서는 한국판 대통령제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할 필요도 있다. 그리고 나라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는 조항이 있는지 없는지, 도대체 헌법에서 고쳐야 할 내용이 무엇이고 어떤 내용이어야 하는지, 헌법해석으로는 해결이 안 돼 반드시 헌법의 명문 규정을 손대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면밀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런 것도 국민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학습의 과정을 통해 이해하고, 열린 의사소통의 장에서 합리적인 대화와 논의를 거친 다음에 합의를 도출해야 새 헌법도 정당성을 갖는다.
명분 없는 개헌 논란 국력만 낭비
개헌이 이렇게 중요하고, 그 절차가 합리적이고 신중해야 함에도 어느 날 갑자기 대통령이 덜렁 답이라고 내놓고 국민에게 자기 생각대로 따라오라고 하니, 과거 유신헌법 시절의 필름을 다시 돌리는 것과 다름없다. 일해야 할 공무원들을 동원해 개헌 선전을 하도록 하고, 국정홍보처가 앞장서서 날뛰며 정치와는 무관한 식품의약품안전청과 문화재청까지 동원해 지금 개헌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는 것처럼 설치다가 18대 국회에서 논의한다며 ‘없었던 것으로 해 주세요’ 하고 말았다. 실로 부질없는 일로 국가예산과 시간만 낭비한 것이다. 그 돈이면 서울역 부근 노숙자들의 문제도 해결하고, 고엽제 환자들의 치료도 더 잘할 수 있다.
자로(子路)가 스승 공자에게 정치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공자는 이렇게 답했다. ‘명분이 올바르지 못하면 말이 이치에 닿지 못하고, 말이 이치에 닿지 못하면 일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명부정즉언불순 언불순즉사불성·名不正則言不順, 言不順則事不成).’ 진실로 나라의 미래를 걱정한다면, 먼저 이 나라가 나아가야 할 방향부터 바로잡고, 그에 맞는 미래 한국의 청사진을 마련한 다음, 이런 청사진을 실현하는 데 개헌이 필요하면 비로소 개헌 논의를 하는 것이 순리다. 그리고 국민이 주권자인 민주국가에서 그런 청사진은 대통령이 마음대로 불쑥 던져 놓고 국민을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참여 속에 국민의 합의로 실현하는 것이다.
이러고 보면, 올해 초부터 사회를 시끄럽게 만들어 온 개헌 추진 소란은 명분부터 옳지 않은 것이었고, 명분이 옳지 않았으니 말의 진정성이 있을 수 없었다. 아까운 국고까지 낭비하며 열을 올려 본들 상식을 가진 보통 국민이 속아 넘어갈 리 없었던 것이다.
헌법조사연구기구 설치가 먼저
그런데 개헌이 중요하다면서 지금 국회의원들이 18대 국회의원이 되는 것도 아닌데 다음 국회에서 논의하자며 끝낸 것도 이상한 마무리다. 이보다는 지난해 제헌절에 국회의장이 제안한 것처럼 국회에 개헌을 위한 헌법조사연구기구를 설치하는 것이 옳다. 개헌의 필요성을 깊이 있게 검토하고, 각국 헌정의 경험과 현실을 조사하고, 제도의 변경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전문가를 총동원해 연구하고, 그 논의를 전 국민에게 실시간으로 공개해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에는 적어도 2, 3년은 걸리므로 지금 당장 국회에 헌법개정특위를 설치하고, 부속 헌법조사연구위를 출범시켜야 다음 정부에서 개헌논의를 지속해 차차기 정부에 적용할 개헌을 할 수 있다. 국민을 더 농락하지 말고 정도(正道)로 가기 바란다.
정종섭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교수·헌법학 jschung@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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