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공대 학생들은 촛불을 밝히면서 밤새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그 대학 교수이며 시인인 니키 지오바니는 “우리는 피와 눈물과 모든 슬픔을 넘어 미래를 창조하는 일을 계속할 것”이라고 했다. 이웃 샬러츠빌에 위치한 버지니아대 학생들도 촛불을 들고 애도했다. 사망한 인도 출신의 로가나탄 교수의 딸이 버지니아대에서 졸업을 앞두고 있고, 사망한 케빈 그라나타 교수는 몇 년 전까지 버지니아대 교수로 재직했었다. 버지니아대의 한 학생은 동생을, 또 다른 학생은 사촌을 잃어버렸다. 이 아름다운 버지니아의 아들딸들은 엄청난 비극을 극복하고 더욱 강해질 것이다.
美공화당이 총기규제 반대한 탓?
하지만 뉴욕 등 동북부에 자리 잡은 진보 미디어는 사건을 정치화하기 시작했다. 총기협회의 로비 탓에 이런 일이 또 생겼다면서, 총기 규제에 반대하는 공화당 때문에 참사가 발생했다고 뒤집어씌우고 있다. 몇몇 진보 논객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행한 ‘이라크인 학살’을 생각한다면 미국이 버지니아공대 사건을 비난할 수 없다는 논리를 폈다.
어느 사회도 강력 범죄로부터 100% 자유롭지 못하며, 미국처럼 개방된 사회면서도 총기 소유가 문화로 정착돼 있는 나라는 총기 범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총기 소지를 단순히 금지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님은 학교를 ‘총기 소지 금지구역’으로 정해 놓은 법이 가져온 부작용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작년에 펜실베이니아 주의 아미시 종파(宗派) 마을에서 일어난 학생 살해 사건처럼, 정신병자가 마음 놓고 학교에 들어와서 총질을 하는 것이다. 총기로 인한 다중살상을 예방하는 문제는 단순하지 않지만 진보 미디어는 이를 정치 이슈화하는 데만 관심을 둔다.
한국의 좌파 일각에서는 교통사고로 죽은 효순이와 미선이 사건을 반미(反美)운동으로 정치화했고, 이는 2002년 대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군이 아이들을 고의로 죽였다는 주장이었으며 심지어는 ‘×할 미국’이란 입에 담지 못할 욕을 노래로 만들어 부르기도 했다. 일부 좌파 성향의 단체는 유가족의 뜻을 무시하고 정치적 목적으로 영결식을 치르기도 했다. 이들의 머릿속에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고 오직 ‘정치’만 존재하며, 그들은 항상 정치화할 죽음을 기다린다는 말이 실감난다.
버지니아공대 사건에서도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유쾌하지 않은 일이 있었다. 한 신문은 범인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기 전 만평에서 “한 방에 33명… 이로써 우리 총기 기술의 우수성이 다시 한번…”이라고 자랑하는 부시 대통령을 만평으로 실었다가 바로 교체하기도 했다.
인류 보편가치에서 접근해야
버지니아공대 사건을 일으킨 조승희의 국적을 두고서 벌어진 논쟁도 씁쓸하기만 하다. 한국 정부가 버지니아의 희생자들에게 애도의 뜻을 표하거나 미안함을 나타내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조승희가 초등학교 때 미국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한국 국적을 갖고 있기는 해도 사실상 미국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이 사과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당연히 한국 측에서 사과해야 한다는 반론도 나오고 있다.
국적으로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재단하려는 것 자체가 문제다. 아무런 잘못이 없던 학생과 교수진이 스러진 것 자체가 슬픔이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에서 문제를 보려는 진지함이 필요하다.
이상돈 중앙대 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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