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창혁]기획 출당(黜黨)

  • 입력 2007년 4월 25일 02시 53분


‘전국구는 그 흔한 감기도 한번 안 걸린다.’ 전국구(비례대표) 예비후보들이 의원직을 승계하려면 기존의 전국구 의원이 제 발로 당을 나가든지 아니면 ‘유고(有故)’가 돼야 하는데 유고는커녕 감기도 안 걸린다는 뜻이다. 이 ‘명언’의 지적소유권자는 이훈평 전 민주당 의원. 15대 때 전국구 순번 16번으로 예비후보였던 그도 김한길 의원이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야 오매불망하던 의원직을 승계할 수 있었다.

▷이 전 의원의 말을 뒤집어 보면 전국구 의원의 자진 탈당이란 ‘유고’보다 더 기대하기 힘들다는 뜻도 된다. 그냥 탈당하면 의원직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는 전국구를 ‘천국구(天國區)’라고 표현한 적도 있다. 국회의원으로서의 특권은 고스란히 누리면서 지역구 관리로 골치를 앓지 않아도 되니 ‘천국구’나 다름없다는 얘기였다. 그러니 누가 그 좋다는 전국구를 스스로 반납하겠는가.

▷의원직을 유지하면서 당을 떠날 수 있는 길은 ‘출당(黜黨)’뿐이다. 당에서 쫓겨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맘씨 좋은 정당은 없다. 한나라당이 2003년 당론을 거부한 김홍신 의원에게 출당 조치 대신 ‘당원권 정지’ 결정을 내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열린우리당 창당 때는 옛 민주당사에 ‘배은망덕한 전국구 의원들은 민주당을 떠나라’는 현수막이 내걸리기도 했다. 마음은 신당에 가 있으면서 몸만 민주당에 남겨 두고 있던 전국구 의원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열린우리당 정세균 의장이 최근 전국구 의원들에게 새로운 통합신당 창당을 위해 출당도 허용할 수 있음을 내비쳤다고 한다. 듣도 보도 못한 ‘기획 출당’이다. 대의제(代議制)의 원칙이나 정치 도의는 아무래도 괜찮다는 발상이다. 더구나 현 국회의 전국구는 정당명부제로 선출된 의원들이다. 과거와 달리 유권자들이 정당투표를 실시해 뽑은 의원들이라는 얘기다. 민주주의와 정당정치 원칙까지 무시하고 무슨 새 정치를 하겠다는 것인지, 열린우리당의 ‘본색(本色)’만 드러날 뿐이다.

김창혁 논설위원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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