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동산 숲에서 뻐꾸기가 뻐꾹 뻐꾹 뻐꾹 하고 울었다. 그러자 아이가 “엄마, 지금 3시야” 하는 게 아닌가? 엄마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다가 곧 깨달았다. 아이는 뻐꾸기 소리를 뻐꾸기시계로만 들었기 때문에 어디선가 시계가 소리를 내는 것으로 착각했음을….
도시에서만 자란 아이에게 자연결핍증이 있음을 엄마는 비로소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시멘트 숲 속에서 발로 흙을 밟아 보지 못하고 자연과의 교감 없이 자란 아이가 훗날 얼마나 메마른 정서를 갖고 황량한 삶을 살게 될까 걱정이 됐다.
공주-왕자처럼 키워 버릇없어
더 큰 문제는 격물치지(格物致知·실제 사물을 연구해 진정한 앎에 이름)를 못 하는 데 있지 않을까 싶다. 사물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대상을 보고 관찰하고 만져 보고 소리를 들어 보는 단계, 즉 격물이 필요한데 도시에서는 그럴 기회가 별로 없다. 문명의 이기에 둘러싸여 생활하며 동물과 식물 등 모든 대상은 책 아니면 영상매체로만 접근하기 때문에 아주 피상적이다. 산에 들에 자동차로 드라이브한다고 한들 날아다니는 것은 새이고, 파란 것은 풀이요 나무라는 식이다. 이런 피상적인 지식은 진정한 앎이 될 수 없다.
어린이 교육이 어찌 격물치지의 문제뿐이랴? 인성교육 문제는 더욱 절실하다. 젊은이 사이에서도 30대는 20대를, 20대는 10대를 버릇없고 이기적이라고 여긴다고 한다. 나이가 어릴수록 존댓말을 모르고 상대에게 함부로 하는 경향이 있다. 집집마다 한 명, 아니면 두 명의 아이를 왕자처럼 공주처럼 키우면서 왕자병 공주병의 어린이가 자라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인다.
엊그제 여섯 명의 손자 손녀를 둔 친구를 만났더니 요즘은 날마다 어린이날인데 왜 특별히 어린이날이 필요한지 모르겠다고 했다.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암울한 시절, 망국 백성으로 천민화한 이들에게는 어린이가 대수일 수가 없었다. 어린이가 가난에 찌들고 어른에게 학대받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소파 방정환 선생이 미래의 희망인 어린이를 위해 어린이날을 제창한 게 아니던가? 어린이날을 필두로 어버이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 게다가 부처님오신날까지 들어 있어 5월은 온통 행사의 달이 되어 버렸다.
이전의 전통시대가 효도를 최고 가치로 했기 때문에 가정의 중심은 어른이고 노인이 대접받던 풍토에 대한 반작용의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오륜 중 하나인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영향으로 나이 어린 사람이 바른 소리 하면 ‘나이도 어린 게 까불어’ 하면서 입부터 막고 무조건 나이로 군림하려 드는 병폐가 아직도 남았으니 어린이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캠페인이 필요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어린이가 모든 가정의 중심이 되고 날마다 어린이날이 되다시피 한 이 시점에서 어린이날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어린이의 기를 살린다고 하여 아이의 욕망을 최대한 충족시켜 주는 교육이 결국 버릇없는 어린이를 양산하지 않는지 되돌아볼 때가 됐다.
어려서부터 예절 가르쳐야
우리 속담에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말이 있다. 이제부터라도 어린이 예절교육의 규범서라 할 현대판 ‘소학’을 만들 필요가 있다. 세상 모든 일이 자신의 뜻대로만 되지 않음을 분명히 알려 주고 어려서부터 예절을 가르쳐 절제를 아는 아이로 키우는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새끼를 위하는 일은 동물의 세계에서 본능적이지만 부모를 봉양하는 일은 인간의 세계에서만 있는 일이다. 가정의 구성원으로서 어린이는 물론 늙은 부모님에 대한 배려가 함께 균형을 잡아야 하는 것도 중요하다.
정옥자 서울대 교수·국사학과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