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이 화낼 자격 있나
이상한 일이다. 누가 누구에게 화를 낼 때인가. 남북 관계에서 어느 쪽이 사고를 쳐 한반도를 긴장의 장소로 몰아 왔는가. 북한의 핵 개발과 계속되는 미사일 시험발사보다 더 큰 위기 요인이 있다는 말인가. 북한은 기회 있을 때마다 ‘6·15 합의’를 거론하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 불발보다 더 분명한 6·15 약속 불이행은 없다. 방귀 뀐 놈이 성내는 형국인 북한 대표단의 행동거지를 보는 것은 참으로 고역이다.
문제는 쌀이다. 북한은 쌀을 투정의 빌미로 삼고 있다. 남한에 쌀을 맡겨 둔 양 빨리 내놓으라고 윽박지른다. 4월 평양에서 열린 장관급 회담에선 식량차관 제공 합의서를 미리 내놓으라고 요구해 회담을 아슬아슬하게 만들었다. 권 수석대표가 얼굴을 찌푸리고 있으니 이번 회담에선 어떤 상식 밖의 행동을 할지….
한국인에게 쌀은 특별한 존재다. 기억을 조금만 뒤로 돌리면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쌀은 할아버지, 아버지가 흘린 땀의 결정체로 떠오른다. 부잣집에서도 설거지하면서 모은 밥알을 깨끗이 씻어 끓여 먹을 정도로 쌀을 귀하게 여겼다.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으로 무역 자유화의 파도가 닥치자 “자리를 걸고 쌀 시장 개방을 막겠다”던 대통령도 있었고, 제네바 관세무역일반협정(GATT·WTO의 전신) 본부 앞에서 쌀 시장 개방에 반대하는 삭발 시위를 한 덕분에 농림부 장관을 지낸 국회의원도 있었다. 현 정부의 쌀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위한 협상 과정에서 “쌀을 건드리면 협상을 깰 수도 있다”며 강경하게 버텨 쌀을 개방 대상에서 제외하는 데 성공했다. 평범한 국민의 농심(農心) 또한 여전하다.
그토록 귀한 쌀이 북한과 결부되면 갑자기 천덕꾸러기가 된다. 우리가 먹고 남는 것을 던져 주는 게 아니라 흘린 땀의 결실을 나눠 주는 고상한 행동인데 남북 회담장에선 쌀이 북한의 기세를 돋우는 빌미로 전락하고 말았다.
정부의 책임이 크다. 대북 식량 지원은 문자 그대로 인도적 지원이다. 굶주리는 동포를 어떻게든 살리자는 숭고한 뜻에서 출발한 것이다. “미사일은 어느 누구를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고 강변하다 덜컥 미사일 발사에 연계해 인도적 지원을 중단한 정부가 사태를 꼬이게 했다. 정부는 인도적 지원을 군사 문제와 연계한 정책상 실수의 후폭풍을 맞고 있는 것이다.
귀한 것은 귀하게 써야
핵 개발과 미사일 발사를 비롯해 북한의 잘못을 고치기 위한 압박 카드라면 더 좋은 게 얼마든지 있다. 정부는 일회성 행사인 남북 열차 시험운행을 한 대가로 북한에 경공업 원자재 8000만 달러어치를 주기로 했다. 북한은 냉담한데 남한의 ‘코드 인사들’이 잔뜩 몰려가 잔치를 벌이는 행사비로 15억 원을 썼다. 북한 주민의 생존과 직접 관련이 없는 사업에 여전히 돈을 펑펑 쓰는 남한 정부를 코너로 몰아 쌀을 보내라고 압박하는 것쯤은 북한 당국에는 아주 사소한 투정일 것이다.
북한의 독촉에 밀려 쌀을 주게 되면 변화를 유도하지도 못하고 인도적 지원이라는 애초의 뜻도 살릴 수 없다. 귀한 것은 귀하게 써야 한다. 더는 쌀을 모독하지 말라.
방형남 편집국 부국장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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