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새로운 발견은 이 맹세문이 1968년 충남도 교육위가 자발적으로 만든 것을 1972년 문교부가 전국 학교에 시행하게 했다는 사실이다. 태어난 뒤 중학교 2학년 때까지 대통령은 한 사람이었기에 어느 나라나 대통령은 한 사람이 계속하는 줄 알았다. 초등학교 입학하며 달달 외운 ‘맹세문’도 ‘원래부터’ 있던 것인 줄만 알았다.
마음에 있든 없든 늘 해야 하는 맹세가 부쩍 불편해졌던 것은 사춘기 들어서였다. 베이징조약 난징조약…그 많은 굴욕적인 조약의 이름을 연대별로 외우며 열강에 국권이 침탈돼 가는 역사에 분노했지만 아무리 피 흘려 되찾은 태극기라 해도 낳아 준 부모도, 연인도 아닌 태극기를 앞에 두고 ‘조국과 민족에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하는 것은 인간적이지 않았다.
시켜서 손에 든 것이 아니고 스스로 커다랗게 펼쳐 든 태극기의 모습이 뇌리에 남았던 것은 1980년 광주의 사진 속에서였다. 시위대가 펼쳐 든 태극기. 그것은 “총구를 겨누지 마라. 우리는 폭도가 아니라 이 나라의 국민이다”라는 절규였다.
그리고 1987년 6월, 훗날 AP통신이 선정한 20세기 100대 사진으로도 뽑힌 한 장의 사진은 한 청년이 태극기를 앞세운 시위대 선두에서 바람처럼 달려가는 모습이었다. 사진의 캡션은 ‘아! 나의 조국’.
거리에서 다시 태극기를 만난 것은 2002년 6월이었다. 월드컵 응원에 나선 젊은이들은 저 높은 깃대에 매달려 있던 태극기를 내려 셔츠로 입고, 치마로 두른 채 “대∼한민국!”을 외쳤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충성을 다짐하지 않아도 되고, 순국을 각오하지 않아도 되는 태극기. 더는 ‘맹세’를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이제 광화문의 태극기는 흔하다. 태극기를 흔들며 외치는 구호들도 제각각이다. 현충일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는 대형 태극기와 성조기가 함께 등장했다. 20년 전 젊은이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히 채우고 앉아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던 그 자리에 중·노년이 주류인 종교단체와 보수단체 회원 2만5000여 명이 모여 “북핵을 폐기하라, 대북 지원을 중단하라”고 외쳤다. 10일 낮에는 바로 그 서울광장에서 1987년 6월 항쟁 20주년을 기념하는 시민들의 대행진이 남대문을 거쳐 명동성당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그 대열도 태극기를 들까?
태극기 앞에서 하고 싶은 맹세는 저마다 다를지 모른다. 지키고 싶은 조국과 민족도 ‘너희는 빼고 우리끼리’일지 모른다.
그 다른 외침들이 오늘 광장에 함께 아우성처럼 나부낄 수 있기까지 수많은 사람이 침묵 속에서 소망했던 것을 생각한다. 국민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당하지 않고 행복을 침해당하지 않으며 위협받지 않는 그런 대한민국을 꿈꾸었던 사람들을….
맹세는 그곳에 있다.
정은령 사회부 차장 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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