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홍찬식]선진화 對포스트 박정희 모델

  • 입력 2007년 6월 12일 19시 30분


냉장고 만드는 회사가 지난해와 똑같은 성능과 디자인의 제품을 시장에 내놓으면 잘 팔릴 리 없다. 기업이 계속 같은 것만 내다 팔면 처음엔 잘 팔렸어도 결국 안 팔리게 된다. 이른바 진보 진영의 중심 인물인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가 말하는 ‘냉장고론(論)’이다. 그는 시민운동이 새 어젠다를 찾는 노력을 게을리 해 위기를 맞았다는 얘기를 이런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정권을 포함한 진보 진영 전체로 확대해도 바로 들어맞는 말이다.

대선 앞두고 무기력한 진보 진영

진보 진영의 고민은 ‘신(新)상품’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데 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20년 내내 민주화라는 같은 물건만 팔아 온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실패 원인은 과거에 집착한 나머지 시대 변화와 국민의 달라진 관심 및 욕구를 읽어 내지 못한 데 있다. 한 이론가는 “진보 세력이 노 정부를 향해 돌을 던진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라고 진단한다. 위기의 원인이 진보 진영 내부에 있다는 뜻이다.

한동안 무력감을 토로해 온 진보 진영이 연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다시 바빠졌다. 이미 효험을 다한 민주화를 버리고 전선(戰線)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는 작업이다. 이들은 ‘97년 체제’를 부각시키려 한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를 계기로 한국이 세계화 속으로 급속히 편입된 것을 말한다. 이들의 지적대로 그 이전과 이후는 큰 차이가 있다.

1997년 이후 국민은 한국 경제와 세계경제가 같이 움직이고 있음을 절감하고 있다. 싫든 좋든 세계화 시대에 들어온 것이다. 대중의 관심이 경제에 대해서는 늘고 정치에 대해서는 줄어들었다. 사회적으로는 개인주의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나은 삶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확연한 변화 속에서 진보 진영이 엉뚱한 곳을 헤매는 동안 보수 진영은 먼저 경쟁의 우위를 차지했다. 보수 쪽이 ‘한국을 선진국으로 만들겠다’며 제시한 선진화 담론은 새로운 구호는 아니지만 진보 쪽에서는 ‘위협적’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상당수 국민이 지지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진보 진영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타결에 대한 찬성 여론이 ‘예상 밖으로’ 높은 것에도 충격을 받은 듯하다.

그제 한나라당 대선 경선후보로 등록한 이명박 박근혜 두 주자의 출사표에는 빠짐없이 ‘선진화’라는 구호가 들어 있다. 하지만 진보 진영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반대한다는 방향만 갖고 있을 뿐 이에 맞설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반대에는 능하지만 대안 제시에는 약한 약점을 다시 드러내고 있다.

진보 진영에 이론을 제공하는 학자들은 ‘97년 체제’를 보완할 대안으로 ‘포스트 박정희 모델’이라는 개념만 대략 정해 놓았다. 앞으로 신자유주의 시대의 대안적 국가모델을 제시하겠다는 것이다. 포스트 박정희 모델이란 ‘97년 체제’ 이전까지가 ‘박정희 모델’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고 붙인 이름이다.

나라 이끌 원칙 놓고 생산적 토론을

사회적 담론 차원에서 본다면 올 대선은 ‘선진화’와 ‘포스트 박정희 모델’의 대결이 될 것이다. 어느 쪽이 시대정신에 맞는 호소력을 지니고 있느냐에 승패가 달려 있겠지만 우리 사회를 이끌고 갈 원칙을 결정하는 토론에서 한쪽이 일방적으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빌 게이츠는 최근 하버드대 연설에서 약자를 배려하는 ‘창조적 자본주의’를 제시해 박수를 받았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혜택 받은 사람들이 힘을 써야 자본주의가 지속 가능하다고 했다. 요즘 거론되는 보수 진영의 선진화 담론 역시 완벽한 틀을 갖추었다고 보기 어렵다. 국민이 원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깊이 있는 논쟁이 필요하다. 진보 진영은 국민의 눈을 끌 만한 새 상품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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