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천광암]일본은 공무원 줄이기 바쁜데…

  • 입력 2007년 6월 21일 03시 01분


꽃망울이 올라올 무렵 입사하는 일본의 신입사원들에게 떨어지는 첫 임무는 ‘벚꽃놀이 자리 찜’이다. 밤 벚꽃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곳에 새벽부터 자리를 깔고 앉아 상사와 선배들이 일과를 마치고 나타날 때까지 마냥 기다리는 일이다. 목 좋은 자리는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취향이 까다로운 상사를 만나면 하루 이틀 정도 밤샘도 각오해야 한다.

부자 나라치고 일본만큼 줄(대기 행렬)이 많은 나라는 드물 것이다. 도쿄(東京)에서 ‘크리스피 크림 도너츠’를 먹으려면 1시간 이상 기다릴 각오를 해야 한다. 할인판매 공고를 냈는데 오전 5, 6시부터 대기 행렬이 생겨나지 않으면 유명 브랜드를 자처해선 안 된다. 라면 한 그릇이라도 맛을 따지는 사람은 뙤약볕 아래서 10분 정도 줄을 서는 것은 예사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모습을 자주 접하다 보면 일본인들의 기질이나 사회 시스템에 사회주의적 요소가 강하게 내재하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상점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은 옛 동유럽 사회주의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1980년대 후반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비롯한 구소련 지도부는 ‘일본은 고도로 발달한 사회주의 국가’라고 생각했다. 1989년과 1990년 두 차례에 걸쳐 쟁쟁한 사회주의 경제학자들로 구성된 대규모 조사단을 파견해 일본의 경험을 배워 가려고까지 했다.

최근 일본에서 뜨겁게 벌어지는 ‘격차(양극화)’ 논란을 보고 있으면 구소련인들이 일본을 사회주의 국가로 간주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1억 인구 모두가 중산층’이라는 신화는 비록 빛이 바랬지만 일본은 여전히 소득 격차가 적은 나라다. 허드렛일을 하는 아르바이트 사원이나 변호사나 똑같이 전철을 타고 출근하는 나라가 일본 말고 또 있을까. 일각에서는 일본이 신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한 이후 소득 분배가 악화됐다고 주장하지만 통계적으로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많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일본 국민은 ‘격차’ 문제를 아주 심각하게 생각한다. 격차 때문에 일본 사회가 금방 붕괴라도 될 것처럼 주장하는 이도 적지 않다.

그런데 사회주의적 평등의식은 일본만 강한 것이 아니다. “중국이 사회주의를 하고 우리가 자본주의를 하는 것은 기적”이라고 감탄하는 데에는 일본인이나 한국인이나 오십보백보다. 격차(양극화) 문제에 해법을 내놓지 못하면 국민의 지지와 신뢰를 잃을 처지이기는 일본 정부나 한국 정부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똑같은 숙제를 안고 있는 한일 두 정부가 내놓은 해법은 정반대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일본 총리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공기업 민영화, 공무원 감축, 낙하산 인사 근절 등 관(官)과 민(民)의 격차를 줄이는 데 최우선 정책순위를 두어 왔다. 이에 비해 노무현 정권은 정부의 몸집을 불리고 민영화의 물꼬를 거꾸로 돌려놨다. 그 대신 강자를 ‘때려’ 약자의 불만을 달래 왔다.

민간의 창의성을 중시하는 세계 경제의 흐름을 감안하면 당연히 전자의 선택이 옳다. 그렇다면 사회주의적 정서에는 후자 쪽이 호소력을 가질까.

극단적으로 심한 격차를 사자성어로는 ‘운니지차(雲泥之差)’라고 한다. 이 말은 한나라 고관 오창(吳蒼)이 초야에 묻혀 있던 교신(矯愼)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 “나는 구름(관직)을 탔는데, 그대는 진흙탕(민간)에 살고 있구려”에서 유래했다.

자신은 구름 위에 앉아 진 땅 마른땅 시비를 가려 봐야 설득력이 있을 리 없다.

천광암 도쿄 특파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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