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정치외교’ ‘국어국문·법’ ‘사학·신문방송’ ‘경영·언론정보’ ‘영상·경제’ ‘심리·경영’….
이런 학과도 있나 싶어 최근에 입사한 후배들에게 물어봤다. ‘학과’가 아니라 ‘이중전공’이나 ‘복수전공’이라고 한다.
30년 만에 필수가 된 ‘부전공’의 추억
기자가 대학에서 공부하던 1970년대 중반에도 ‘부전공’은 있었다. 그러나 결이 다른 두 학문을 비슷한 비중으로 공부하고 양쪽 학위를 모두 받는 ‘이중전공’이나 ‘복수전공’은 없었다.
당시에는 부전공마저도 눈치를 봐야 했다. 부전공 지원에 제한을 두기도 하고, 부전공을 하면 아무리 성적이 좋아도 졸업 때 상을 주지 않는 학과도 있었다. 부전공에 들인 시간만큼 전공을 소홀히 했지 않느냐는 것이다. 부전공이 전공보다 합격선이 높거나 취직이 잘되는 소위 인기 학과가 대부분이어서 자존심이 상한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30년 만에 세상이 바뀌었다. 얼마 전 서울대는 내년 신입생부터 ‘제2전공’을 의무화하겠다고 발표했다. 서울대가 ‘제2전공’의 한 형태인 복수전공을 도입한 게 1998년. 인기가 높지는 않다. 첫해엔 학부생 2만3039명 중 85명(0.37%)만이 복수전공을 택했고, 조금씩 늘긴 했지만 지난해에도 1만9812명 중 426명(2.15%)에 불과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제2전공’을 강제하겠다는 것은 획기적인 시도다.
학문을 잘게 쪼개 벽을 쌓으면서 권위를 세워 온 대학이 이제는 왜 학과의 벽을 허물려고 기를 쓰는 것일까. 시대가 그걸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계는 요즘 융합, 소통, 통섭을 요구받고 있다. 파편화된 지식으로는 불확실한 내일의 문제를 풀 수 없다는 결론에서다. 일본에서 쓰는 ‘학제간(學際間) 연구’라는 말에도 비슷한 고민이 배어 있다.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연구라는 뜻이다. 일본 최고 명문대인 도쿄대는 ‘지식의 구조화’를 내세우고 있다. 각기 다른 학문의 성과를 특정한 목적을 위해 융합시키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이런 움직임의 저변에는 외부의 변화와 욕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절박감이 있다. 변화는 부정, 저항, 실시, 탐구의 단계를 거쳐 뿌리내린다. 변화의 필요성을 부정하고 저항하다 결국은 수용하게 되고, 나중에는 더 나은 변화의 방법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서울대의 ‘제2전공 의무화’는 변화를 수용하는 ‘실시단계’에 와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탐구단계’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그래서 요즘 벌어지고 있는 교육부와 대학의 갈등은 허망하다. 갈등의 본질은 어떻게 학생을 뽑느냐가 아니다. 우리 교육이 가야 할 방향에 대한 시각차다. 이 정부와 그에 맹종하는 교육부가 과거의 잣대로 변화의 필요성을 부정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소모적인 논쟁일 뿐이다.
30년 전 눈치를 보며 선택했던 부전공을 이제는 대학 당국이 의무화할 정도로 교육환경이 바뀌었다는 것은 무얼 뜻하는가. 한때는 옳았던 제도도 바꾸거나 버려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개천에 집착하지 말고 대해를 꿈꿔야
그런데도 이 정부는 개천에서 용이 나도록 해야 한다며 ‘배려’를 얘기한다. 교육의 기회균등과 보편성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럴듯하지만 고교 졸업생의 82% 이상이 대학에 진학하는 지금 ‘배려’의 깃발을 드는 것은 지독한 포퓰리즘이다. 고교 졸업생 100%가 대학에 들어가면 교육 당국의 의무는 끝나는가. 그러면 박수를 받을 것인가.
요즘은 개천에서 용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된다. 길러야 한다. 교육에 경쟁원리를 도입하고 수월성의 씨앗을 뿌려야 하는 이유다. 개천에서 나오는 용은 쓸모도 별로 없다. 개천의 용일 뿐이다. 요즘 용은 큰 바다에서 외국의 인재들과 싸우면서 커야 제 몫을 한다.
개천을 떠나 대해로 나가면 용이 될 인재들마저 개천에 주저앉혀 이무기로 만들고 있는 게 요즘 한국 교육이다. 용을 본 적도 없는 이무기들이 용을 기르려는 데서 나오는 비극이다.
심규선 편집국 부국장 ksshim@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