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의 대북 유화 정책은 한미 양국에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핵 해결을 위해 불가피한 실용주의적 선회라는 의견과 북한의 기만적인 핵 게임을 연장시켜 줄 졸책이라는 비판이 대립했다.
2·13합의는 북한 핵시설의 폐쇄 봉인 불능화를 규정하지만 이미 보유한 핵무기와 플루토늄을 폐기한다는 내용은 없다. 또 다른 핵무기 제조 경로인 농축시설을 규명하는 조항도 없다. 합의를 이행해도 여전히 ‘기본 핵능력’이 남는다는 뜻이다. 북한은 2·13합의만을 이행하거나 이행하는 자세를 취하면서, 즉 일정한 핵 능력을 유지하면서 평화공세를 통해 충분한 반대급부를 얻어 낼 수 있다고 믿을 이유가 많다.
첫째, ‘평화의 바람’이 북한에 유리하게 불고 있다.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 해체(CVID) 외의 타결을 불용한다던 미국이 지금은 2·13합의를 이행하겠다는 북한의 말에 흡족해하고 한국은 대북 지원의 속도를 더하고 있다.
북한의 내부 사정도 그렇다. 일정한 핵 능력을 유지하니 절체절명의 체제수호 수단을 여전히 지킨다. ‘지도자의 위대한 과학 업적으로 미 제국주의를 극복했다’는 선전 논리를 스스로 철회할 필요가 없다. 그것만으로도 남한을 위협할 수 있고 남한 내 보혁 갈등을 부추길 수 있다.
둘째, 북한의 행보가 한국의 정치 상황과 불가분의 연관 관계를 가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2·13합의의 이행 과정은 북한이 많은 반대급부를 얻으면서 한국 언론과 방송의 헤드라인을 장식할 장밋빛 기사를 대량생산할 수 있는 기간이다. 이런 카드를 거머쥔 북한이라면 어떻게든 남한의 대선에 영향력을 미치려 하지 않을까.
북한이 이런 오해를 받기 싫다면 스스로 진심을 보여 주면 된다. 완전한 핵 폐기를 약속하는 추가 합의를 조기에 수용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그렇다면 대북 지원에 인색할 필요가 없다. 미국도 북한이 핵무기와 플루토늄을 내놓고 농축프로그램의 존재를 고백한다면 이것을 해체하거나 인수하는 데 돈을 아낄 필요가 없다.
북한의 핵시설 폐쇄는 분명 반가운 소식이다. 하지만 핵 폐쇄 소식에 도취되어 이후에 펼쳐질 시나리오를 내다보지 못한다면 너무 근시안적이다. 냉정한 관찰이 필요하다. 북한이 완전한 핵 폐기 약속을 미루고 핵 폐쇄 및 불능화와 관련한 뉴스거리를 생산하는 데에만 매달린다면 ‘시한부 평화 공세의 시작’이라는 의혹을 떨칠 수 없다.
대북 지원 준비와 함께 핵 평화 공세에 대비해야 할 때다. 지금까지 핵 게임에서 북한은 조건(Term) 속도(Tempo) 시기(Timing) 등 3T를 장악했다. 우리는 경계(Precaution) 신중(Prudence) 인내(Patience) 등 3P로 대처해야 한다.
김태우 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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