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본 같은 이 초상화는 초본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이수미 학예연구관은 “화가가 여러 스타일의 눈썹, 수염 중에서 초상화 주인공의 마음에 드는 것으로 초본을 바꾸기 위해 이처럼 그렸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조선 시대 초상화는 실물을 정확히 묘사하면서도 정신과 인품까지 담아냈다. 그러나 박물관에서 만나는 초상화는 대부분 완성본. 초상화가 초본부터 정본까지 7단계를 거쳐 완성됐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국립중앙박물관(02-2077-9487)이 31일∼10월 28일 선보이는 ‘조선 시대 초상화 초본전’은 그처럼 엄밀한 제작 과정을 일별할 수 있어 주목된다.
조선의 초상화는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그리는 과정 자체다. ‘전신(傳神)’ 사상에 따라 실물과 닮았더라도 성격과 정신을 옮기지 못하면 낮게 평가됐다.
초본은 ‘완성’부터 어려웠다. 화가는 기름종이(油紙)에 유탄(柳炭·버드나무를 태운 숯)으로 윤곽을 그리고 이 위에 먹선을 그렸다. 이렇게 그린 초본은 완성본 못지않게 얼굴 묘사가 자세했다. 흥미로운 것은 초본에도 종이 뒤에서 칠하는 배채(背彩) 기법을 사용해 색칠했다는 점이다. 정본에 채색할 때의 효과를 미리 확인한 것이다. 특히 얼굴색을 중시했다.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1713∼1778)의 초상화 초본 뒷면 얼굴 부분에도 살색이 뚜렷하다.
이는 고려 불화를 제외하고 한국회화사에서 찾기 어려운 기법이다. 이 연구관은 “초본이 품평에서 합격해야 정본을 그릴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임금을 그린 어진의 경우 임시 관아인 도감(都監)까지 설치해 초본을 품평했다. 품평회에선 열띤 토론이 오갔다.
품평이 어찌나 엄격했던지 초상화에 뛰어났던 화가 변상벽도 1763년 학자 김원행(1702∼1772)의 초상화 초본을 7번이나 고쳐 그리다 포기했다. 채제공(1720∼1799) 초상화(보물 1477호)에는 어깨 부분을 3번 고쳐 그린 흔적이 선명하다.
초본이 합격하면 비단에 옮겨 정본을 그릴 수 있었다. 조선 문신 안집(1703∼?) 의 초상화 초본 오른쪽에 정본차(正本次·정본에 쓸 것)라고 적혀 있다. 여러 초본을 그려 합격한 것만 정본을 썼다는 증거다. 화가는 합격한 초본 위에 비단을 올려 먹으로 따라 그린 뒤 배채법을 사용해 정본을 완성했다.
이번 전시엔 채제공 초상의 초본과 정본을 비롯해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기사경회첩의 이의현(1669∼1745) 초상 제작 과정을 7단계로 재현한 작품도 함께 선보인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조선 초상화 제작 7단계▼
1단계 기름종이에 유탄으로 윤곽을 그린다.
2단계 윤곽을 따라 먹선을 그린다. 얼굴을 자세히 묘사한다.
3단계 배채 기법으로 종이 뒤에 채색한다. ‘완성된’ 초본은 엄격한 품평을 거친다.
4단계 초본 위에 비단을 올려 먹으로 따라 그린다.
5단계 먹선으로 초상화 윤곽을 완성한다.
6단계 배채법으로 비단에 채색한다. 얼굴색이 명징하게 드러나게 한다.
7단계 비단 앞면에 채색을 보완해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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