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달 부산에서 열릴 8·15 민족대축전은 우리 정부가 허가해 준 합법적 행사다. 그러나 행사장을 한 야당 의원의 말처럼 ‘민족 해방구’로 만든다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불법이 된다. 합법적 공간에서 불법 행위라니, 참 절묘한 결합이다. 모든 게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이 낳은 원칙 없는 포용정책의 산물이다. 좌파가 흔히 쓰는 수법으로 과거에도 있긴 했으나 ‘햇볕’이 갈라놓은 우리 사회의 틈새에 아예 뿌리를 내렸다.
북한은 이처럼 상황에 맞는 투쟁 방법의 배합(配合)과 함께 호소력이 강한 다의적(多義的)인 전략용어를 곧잘 사용한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과 6·15남북공동선언 이후 북이 전면에 내세우는 ‘우리 민족끼리’가 그런 예다. 북은 이 구호를 숫제 ‘이념’으로 분류해 놓고 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도 “우리 민족끼리 통일합시다”라는 말이 인사가 된 지 오래다.
8월, 釜山에 몰아칠 ‘민족 광풍’
그러나 북이 말하는 ‘민족’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민족이 아니다. 북 스스로도 자신들을 ‘김일성, 김정일 민족’이라고 하거니와, 그들에게 민족은 북의 사회주의 헌법 제4조(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권은 노동자 농민 근로인텔리와 모든 근로인민에게 있다)에 명시된 근로인민계급을 뜻할 뿐이다. 주권이 노동자 농민에게 있으므로 통일의 주체인 ‘민족’도 근로인민에 한정된다. 우리 헌법 제1조 2항(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에 나오는 ‘국민’과 다르고, 이를 기초로 남북한과 해외동포 전체를 민족 구성원으로 보는 우리의 ‘민족’과도 다른 것이다.
그렇기에 북은 앞에서는 ‘민족끼리’를 외치면서도 뒤로는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정파나 세력은 철저히 배격한다. 지난번 평양에서 열린 6·15 민족대축전 때 한나라당 박계동 의원의 주석단 착석을 막은 것은 단적인 예다. 어디 그뿐인가. 평양에 다녀온 사람들은 대부분 겪었겠지만 순안공항에 내리는 순간 북은 여권과 휴대전화를 일제히 수거해 간다. “돌아갈 때까지 보관하겠다”는 것이지만 외부와의 연락이나 주민과의 접촉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사소한 일 같지만 ‘우리 민족끼리’의 허구를 이처럼 극명하게 보여 줄 수가 없다.
북이 노리는 것은 결국 민족감정과 동포애를 부추겨 우리 사회에 친북(親北) 분위기를 확산시키겠다는 것이다. 위로는 미국과의 직접대화를 통해 주한미군 철수를 도모하고, 아래로는 ‘우리 민족끼리’라는 깃발 아래 통일전선전략을 민족통일운동으로 포장해 철군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북한을 정말 어떻게 이해(理解)해야 하나. 이렇게도 감싸고, 저렇게도 감싸 봤지만 북은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도 틈만 보이면 상대의 선의(善意)를 이용하려 들고, 세(勢)가 불리하면 말을 바꾼다.
13일 북이 미국과의 양자 군사회담을 제의하면서 ‘정전협정 준수 의무’를 거론한 것도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정전협정을 무력화(無力化)하기 위해 1994, 95년 판문점에서 중립국감독위원회를 몰아낸 북이 이제 와서 ‘정전협정 준수 의무’ 운운하고 있다. 중국을 정전위원회에서 철수시키기 위해 1994년 송호경 전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2004년 사망)을 베이징에 보내 중국의 원로 지도자들에게 머리를 조아리게 했던 북이다.
‘대북 딜레마’에 빠져 시간 낭비만
북이 그런다고 우리가 민족 통일의 문제를 외면할 수 없기에 절망감이 더 큰지도 모르겠다. ‘안보 딜레마’가 아니라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대북 딜레마’에 빠져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할지, 정말 답답하다. 세상은 자꾸 앞서가는데 말이다.
다시 8월이다. 반미(反美) 자주의 꽹과리 소리가 벌써 귓전에 뜨겁다. ‘우리 민족끼리’의 광풍이 몰아치더라도 북에 관한 이 불편한 진실에 눈을 감지는 말자. ‘통일의 굿판’ 위에서 춤을 추더라도 무슨 춤인 줄은 알고 춰야 할 것 아닌가. 그것이 그나마 ‘대북 딜레마’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첫걸음이다.
이재호 수석 논설위원 leejaeho @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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