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목숨을 대신하여 살리고 싶은 형제이며 저의 심장을 꺼내 주고 싶은 형제입니다.” 의료봉사단원을 이끌고 아프가니스탄에 갔다 탈레반에 피살된 배형규 목사의 친구는 이렇게 울부짖었다. 사진을 통해 본 배 목사의 인상은 선하다. 나보다는 남을 챙기는, 열 번 만나는 이웃에게 열 번 다 인사를 하는 착하고 겸손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아프간에서 납치된 나머지 22명의 석방교섭에서 삶의 아이러니는 극점에 이른다. 탈레반이 피랍자들의 목숨과 맞교환을 요구하고 있는 동료들이 누구인가. 무고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학살과 테러, 납치를 일삼았던 그들의 지도자가 아닌가. 그들도 읊조렸을 것이다. ‘신’과 ‘정의’를…. 만일 그들에게 몸값을 지불한다면? 학살과 테러의 악순환에 사용될 것이다. 선한 동기는 이렇게 돌고 돌아 나쁜 결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운명론을 말하자는 것이 아니다. 배 목사의 죽음과 이번 피랍 사태에는 신앙과 이성, 성속(聖俗)의 담론에 대한 결코 그냥 지나쳐선 안 될 교훈들이 숨겨져 있다.
우선 신앙 공동체와 국가(또는 세상) 공동체 간의 충돌이다. 아프간은 여행제한지역이었다. 정부에서도 끊임없이 아프간 여행에 대해 경고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신앙적 소명의식에서 그곳에 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세상 공동체가 져야 한다. 그들의 구출은 정부의 몫이다. 그들의 생환에 마음 졸이고, TV 앞을 떠나지 못하는 것도 국민 모두의 몫이다. 신앙으로 시작했지만 결국은 세상의 일이 됐다.
위험으로부터의 피난처를 신앙과 믿음이 제공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도 분명해졌다. 믿는 사람도 아프면 병원에 가야 한다. 공부 안 한 학생이 기도한다고 좋은 대학에 갈 수는 없다. 명철한 이성, 어디에 위험이 있는지를 파악하는 예민한 후각, 서구인이 아닌 한국인도 인질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현지 상황 및 국제 정세에 대한 성찰, 그것은 ‘신의 섭리’에 조금이라도 가깝게 가려는 크리스천의 당연한 책무다.
개신교의 ‘소통 방식’에도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 전래(傳來) 이래 개신교가 이처럼 사회 여론의 표적이 된 적은 없었다. 십자가는 수직과 수평, 세로와 가로의 교차를 의미한다. 예수가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전념했다면 그는 오늘날 구약(舊約) 속의 ‘선지자’ 정도로 기억됐을 것이다. 그는 삶을 오히려 속박하는 위선적인 율법, 가난한 자와 과부를 차별하는 억압구조에 맞서 새로운 ‘복음’을 선포했다. 말이 아닌 삶으로…. 십자가의 죽음으로….
생명은 소중하다. 우선은 피랍자 전원이 가족 품에 안기기를 기원하자. 상처에 소금 뿌리고 가슴에 대못을 박는 독설은 또 다른 증오를 양산할 뿐이다. 그들의 무사귀환이 이뤄진 뒤 차가운 공론화와 뜨거운 자성의 바람이 불었으면 한다.
윤영찬 문화부 차장 yyc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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