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우리당만 해도 김성호 전 열린우리당 의원의 표현을 빌리자면 ‘무(無)개념 잡탕정당’이다. 창당 때엔 민주당과 한나라당 탈당 세력, 유시민 김원웅 씨 등의 개혁국민정당 세력 등으로 출발했으나 2004년 총선을 거치면서 운동권 세력과 기업 최고경영자(CEO) 출신의 시장주의자들까지 합세했다. 한마디로 좌파에서부터 신자유주의자까지 몽땅 모인 셈이다. 그런데 민주신당은 이런 열린우리당에다 다른 세력까지 끌어들였거나 끌어들이려고 하니 ‘무개념 잡탕정당 곱빼기’라고 하는 게 더 적합할 것 같다.
민주신당의 대표를 맡은 오충일 목사는 이를 가리켜 ‘우리 입맛에 가장 잘 맞는 정당’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6일 기자들과의 오찬 자리에서 “잡탕정당이 나쁜 것이 아니다. 글로벌 퓨전 추세에 가장 걸맞은 정당 모델이다. 밥 중에서도 잡탕밥, 비빔밥이 한국사람 입맛에 제일 잘 맞다”고 했다. 동석했던 김상희 최고위원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치성향상 명확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약간 두루뭉술하게 서로 보듬어 주는 것을 좋아한다”고 거들었다.
이른바 민주세력이 언제부터 입맛과 성향이 달라졌는지 모르겠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그들은 전무(全無) 아니면 전부(全部)라는 선명성을 생명처럼 여기다시피 했다. 선명하지 않은 노선이나 정책은 가차 없이 ‘사쿠라’로 매도했다. 1964년 언론윤리법안을 둘러싸고 벌어진 윤보선 유진산 씨 간의 사쿠라 논쟁이 그런 경우이고, 1970년대 중반엔 이철승 신도환 씨 등이 중도통합론을 내세웠다가 졸지에 사쿠라로 몰려 정치적 몰락의 길을 걸었다. 중도통합론은 국내 정치는 당 간에 서로 경쟁하되 외교안보 문제는 초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별 것이 아닐 수 있는데도 그 당시엔 야당의 선명성을 해치는 것으로 공격당했다.
이런 선명성 경쟁은 희대의 정치적 라이벌인 김영삼(YS) 김대중(DJ) 씨 간에 특히 치열해 1985년 총선 때엔 참여와 불참을 놓고 서로 싸우기도 했다. 그 양상은 권력 다툼으로까지 이어져 결국 1987년 6월민주항쟁 이후 치러진 첫 직선제 대선에 각자 출마함으로써 둘 다 패배하고 만다. 두 사람의 경쟁은 1990년 YS가 노태우 김종필 씨와 3당 합당을 이룸으로써 사실상 끝났고, DJ를 비롯한 민주세력은 이를 ‘정치적 야합’이라고 극렬히 비난했다. 당시 노무현 씨는 3당 합당이 6월항쟁 정신을 배반한 것이라며 자신을 정치의 길로 이끌어 준 YS의 품을 떠났다.
지금의 민주신당은 뚜렷한 노선이나 이념이 없으니 1990년대 이전 선명성의 관점에서 보면 사쿠라가 따로 없고, 참여세력의 잡탕 수준은 3당 합당을 능가할 정도다. 그런데도 민주신당에 몸담은 사람들은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다. 이질적인 재료가 혼란스럽게 뒤섞인 잡탕 식단으로 대선 장마당에서 손님을 얼마나 끌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진녕 논설위원 jinny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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