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6·15 그리고 7년, 감격은 허망했다

  • 입력 2007년 8월 8일 23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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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열린 첫 번째 남북 정상회담은 분단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남북한 정상이 만나 화해·협력과 통일방안을 논의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국민을 감격시킨 일대 사건이었다. 많은 국민이 남북통일이 멀지 않았다는 기대 속에 환호했다. 덩달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인기도 치솟아 인터넷 팬클럽이 생길 정도였다. 가히 ‘김정일 신드롬’이라 할 만했다. 그러나 7년이 지난 지금, 그 감격과 환호는 허망함으로만 바뀌었다.

그동안 남북한 인적교류와 교역이 크게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개성공단을 통한 남북 경제협력도 시범사업이긴 하지만 실현됐다. 1998년에 시작된 금강산 관광도 정상회담에 힘입어 지금까지 150만 명이 다녀왔다. 남북 간 인적교류도 30여만 명에 이른다. 북의 비협조로 올해 5월에야 성사되긴 했어도 경의선과 동해선 남북열차 시험운행도 가시적 성과 중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비롯한 6·15남북공동선언 합의사항은 대부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납북자, 국군포로, 이산가족 문제 가운데 납북자와 국군포로 문제는 전혀 진전을 보지 못했다. 이산가족 상봉은 북이 남측에서 쌀과 비료를 받아내기 위한 ‘생색내기 이벤트’로 활용됐을 뿐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북의 볼모가 돼 밑 빠진 독에 물붓기 식으로 퍼주다시피 했다. 지난 10년 동안 북을 돕는다는 명분 아래 남북협력기금에서 나간 돈만 5조5000억 원에 이른다.

그런데도 북한은 근본적인 개혁 개방을 거부했다. 적화통일 노선을 포기하지 않았고, 대남 통일전선전략에 어떤 변화도 보여 주지 않았다. 오히려 북은 우리 사회의 친북좌파 단체와 인사들을 동원해 끊임없이 분열과 혼란을 획책했다. 이로 인해 우리의 대북 경계심과 안보의식이 허물어졌고, 국가보안법은 사문화됐으며, 남남갈등은 고조됐다.

북한은 6·15공동선언에 명시된 ‘민족 균형발전’을 내세워 남으로부터 온갖 지원을 받으면서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우리 민족끼리 통일문제를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간다’는 대목을 근거로 ‘자주통일’ ‘반전평화’ ‘민족대단결’을 내세우며 우리 사회를 반미(反美) 투쟁의 장(場)으로 바꿔놓았다. 그러면서도 뒤로는 핵과 미사일 개발을 계속해 마침내 지난해 10월 핵실험까지 했다.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기는커녕 오히려 부추기는 꼴이 되고 만 것이다. 2002년 6월에는 북한 경비정이 연평도 서쪽 해상의 북방한계선(NLL)을 무단 침범해 선제공격으로 우리 해군 장병 6명의 생명을 앗아가기도 했다.

그런 북한에 이 정권은 ‘자주(自主)’로 맞장구를 침으로써 한미동맹의 이완을 자초했다. 북이 미사일을 발사해도 “우리를 겨냥한 것이 아닐 것”이라고 했고, “핵무기가 자위용(自衛用)이라는 북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고 함으로써 한미동맹을 계속 유지할 의사가 있는지를 의심받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는 전시작전통제권 조기 전환 결정으로 나타났다. 북으로서는 쾌재를 부를 만했다. 이 모두가 첫 남북 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 이후 벌어진 일이다. 우리가 두 번째 정상회담을 냉정하게 지켜봐야 할 이유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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